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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베카의 선택 (2)

[월간 꿈 CUM] 유랑 _ 이야기 구약성경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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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의 사다리 조형물.(이탈리아 밀라노 대성당 외벽) 야곱은 어느날 꿈속에서 하늘에 닿아있는 사다리(층계)를 보게 된다. 주님께서 그 위에 서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너에게 약속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않겠다.”(창세 28,15)

활달한 성격의 에사우는 모험심과 도전 정신이 강했고, 야곱은 지적이고 사려가 깊으며 차분한 성격이었다. 들사람 에사우는 당연히 체격도 우람했을 것이다. 반면 야곱은 약하고 온순했다. 

여기서 이사악, 에사우, 야곱 시대가 거친 유목 사회였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당시 중동 지역에선 유목생활이 주류였다. 그래서 풀이 많은 좋은 땅을 차지하기 위한 부족 단위 소규모 전투가 빈번히 일어나던 때였다. 이런 여건에서는 사냥을 잘하는 늠름한 기상의 에사우가 부족을 이끌 지도자로 적합했다. 야곱은 양치기로는 적합했을지 몰라도, 전사 스타일은 아니었다.

아버지 이사악도 그래서 맏아들인 에사우를 더 사랑했다. 결국 야곱은 에사우의 그늘에서 성장할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 레베카가 야곱을 더 사랑했던 이유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어머니는 아버지로부터 사랑받지 못하는 자식에게 더 마음이 끌리는 법이다. 성격이 전혀 다른 쌍둥이. 이쯤 되면 눈치 빠른 사람은 곧 갈등이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을 쉽게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역시 예상대로 큰일이 벌어진다.

아버지 이사악은 에사우에게 축복을 내리고 가문을 이어가도록 할 생각이었다. 그래서 하루는 맏아들에게 장자권을 수여하기 위해 에사우를 부른다. 하지만 야곱이 어머니의 도움으로 아버지 이사악을 속였고, 결국 에사우에게 주어질 맏아들의 권리와 축복을 빼앗는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에사우는 불같이 화를 냈다. 성경은 에사우가 겪었을 상실감과 분노에 대해 비교적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상세한 묘사를 하는 이유는 그만큼 이 내용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에사우는 아버지가 야곱에게 해준 축복 때문에 야곱에게 앙심을 품었다. 그래서 에사우는 ‘아버지의 죽음을 애도하게 될 날도 멀지 않았으니, 그때에 아우 야곱을 죽여 버려야지’ 하고 마음속으로 생각하였다. 레베카는 큰아들 에사우가 한 말을 전해 듣고는, 사람을 보내어 작은아들 야곱을 불러 놓고 그에게 말하였다. ‘얘야, 너의 형 에사우가 너를 죽여서 원한을 풀려고 한다. 그러니 내 아들아, 내 말을 듣고 일어나 하란에 있는 내 오라버니 라반에게로 달아나라. 네 형의 분이 풀릴 때까지, 얼마 동안 그분 집에 머물러라.’”(창세 27,41-44)

힘으로는 야곱이 밀릴 수밖에 없었다. 놀란 야곱은 가나안을 떠나 하란을 거쳐 메소포타미아 지역으로 몸을 피했다. 이후 야곱은 오랜 세월 타향살이 과정에서 피땀 흘려 재산을 모았고, 큰 부자가 됐다. 그러던 어느 날 고향이 그리워졌다. 야곱은 형에게 돌아가 예전의 잘못을 빌고 깨진 형제간의 우애를 되살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고향으로 돌아와 많은 재물을 주고, 형과 화해를 했다.

그런데 중요한 이야기는 여기서부터이다. 야곱이 에사우를 만나러 가는 길에서, 그리고 에사우와 화해한 후 베텔에서 역사적 사건이 일어난다. 전승이 두 가지이기 때문에 성경도 이 두 가지 이야기를 함께 전하고 있는데, 성경의 골치 아픈 편집 역사는 차치해 두자. 이야기의 핵심만 알면 된다. 바로 야곱이 하느님으로부터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받는다는 것이다.

야곱의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땅에 대한 약속, 하느님에 대한 순명, 믿음의 중요성 등 인간이 신을 섬기는 원리들을 확립했다면, 아브라함의 손자 야곱은 그 약속이 이루어질 장(場)을 마련했다. 인류 영성사에 큰 주춧돌을 놓는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의 탄생이 바로 그것이다.

“너의 이름은 이제 더 이상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 불릴 것이다.”(창세 32,29) “이스라엘이 이제 너의 이름이다.”(창세 35,10)

성경에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최초로 나타나는 순간이다. 여기서 궁금증이 생긴다. 유대인, 히브리인, 이스라엘인…. 모두 똑같은 말일까. 다르다면 왜 그럴까. 각자 어떤 의미를 담고 있을까.


글 _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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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3-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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