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교구 시복시성위원회 위원장 구요비 주교는 2일 ‘하느님의 종’ 바르톨로메오 브뤼기에르 주교 시복 추진 제1차 심포지엄에서 초대 조선교구장 시복의 당위성을 설명했다.
구 주교는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 선교를 자원함으로써 조선대목구가 시작됐고, 교황청과 조선 교회를 잇는 다리가 됐으며,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조선으로 들어오는 촉매가 됐다”며 “브뤼기에르 주교의 시복 운동과 동시에 그분의 선교 열정이 바람을 일으키도록 교회 구성원 모두가 앞장서자”고 당부했다.
서울대교구 시복시성위원회와 한국교회사연구소가 이날 개최한 ‘브뤼기에르 소 주교의 생애와 조선 선교 배경’ 주제 심포지엄에서는 파리외방전교회가 조선 선교지 교섭 문제를 알린 1826년 1월 6일자 공동서한과 1832년 2월 공동서한, 브뤼기에르 주교가 작성한 1829년 5월 19일자 시암대목구 보고서가 우리말로 처음 소개됐다. 또 브뤼기에르 주교가 35일간 체류한 중국 산동과 직예 접경 교우촌이 오늘날 산동성 하택시 조현-장색진-동명현 지역이라는 주장도 새롭게 제기됐다.
파리외방전교회 부지부장 허보록 신부는 “브뤼기에르 주교는 선교사라는 소명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갖고 있었다”면서 “그는 모든 어려움 속에서 하느님의 섭리를 발견하고, 고통과 위험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강인한 희생을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조현범(토마스) 교수는 지난 10월 파리외방전교회 고문서고에서 브뤼기에르 주교 관련 자료들을 조사하고 돌아왔다. 조 교수는 우리말로 처음 소개한 공동서한과 브뤼기에르 주교의 보고서를 통해 그가 왜 파리외방전교회의 관례를 깨고 조선 선교를 자원했는지 이유를 찾으려 했다. 조 교수는 “그의 내면에 어떤 움직임이 일어났는지는 헤아릴 수 없지만, 외교인에게 세례를 주고 성사를 집전하는 역동적인 선교와 직접적인 복음 전파를 열망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조심스레 밝혔다.
교회사연구자 방상근(석문 가롤로) 박사는 브뤼기에르 주교의 조선 입국을 둘러싼 논란에 대해 “브뤼기에르 주교는 자신의 입국을 반대하는 신자들의 염려에 대해 ‘박해에 대한 지나친 두려움 때문에 유럽인보다 중국인 사제를 선호한 것’이라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방 박사는 “자신의 선교 임무가 하느님께로부터 나왔고, 교황께서 직접 파견하셨다는 것을 확신했기에 자신과 서양 선교사들이 입국하는 것이 조선 교회와 신자들을 위해 필요한 일임을 조선 교우들을 설득해 이 논란을 해결했다”고 설명했다.
중국 마가자에서 브뤼기에르 주교의 무덤을 처음 확인한 양업교회사연구소 명예소장 차기진(루카) 박사는 “산동 직예 교우촌 지역을 명나라 때 황하고도 너머에 있는 오늘날 산동성 하택시 조현-장색진-동명현”이라고 비정(比定)했다. 직예 교우촌은 지금까지 하북성 헌현 교구청 자리로 추정돼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