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들이 보기에 지금 교실의 모습은 많이 낯섭니다. 길게 기른 머리에 화장을 한 학생들을 보면 불량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두발 단속과 복장 불량으로 단속에 걸리면 1교시부터 욕설과 함께 맞으면서 수업을 들어야 했던 그 때 그 시절. 그래서 내가 지금 학교에 왔는지 군대와 왔는지 구분이 되지 않았던 시절과 비교하면 지금의 학교는 가르치는 일을 포기한 것처럼 보입니다. 어른들이 보기에는 때려서라도 가르치는 것이 교육인데 말이지요.
최근 국민의힘 주도로 서울시 의회는 학생인권조례를 폐지시켰습니다. 충남도 의회에서 폐지한 이후 두 번째입니다. 이에 반발해 조희연 서울시 교육감은 천막농성을 시작했습니다. 조례폐지에 조 교육감은 거부권 행사를 말하고 있습니다. 야권을 비롯한 정치권도 반발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서이초 교사 사망 이후 윤석열 대통령은 교권 추락의 이유로 학생인권조례를 들었습니다. 이주호 교육부 장관도 학생의 인권이 지나치게 강조돼 교권이 추락했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에 학생인권조례가 학생들의 동성애와 성문란을 가져올 수 있다는 일부 종파의 주장과 학교가 이념교육에 빠져있다는 일부의 주장도 폐지에 힘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교사의 권리와 학생의 인권은 대립될 수 없습니다. 서이초 사건은 학생들이 ‘금쪽이’가 되어서가 아니라, 일부 학부모의 과도한 민원 때문입니다. 학생 인권 보호와 교권 보호는 함께 가야지, 절대 대립의 개념이 아닙니다. 제자들을 체벌해서 교사의 권위를 세우겠다는 선생님은 한 분도 없습니다. 교사의 적은 학생이 아닙니다. 교권과 학생 인권은 한쪽이 죽여야만 사는 게임이 아닙니다.
더 큰 문제는 교실의 인권 보호를 정치의 진영 논리로 파악한다는 것입니다. 인권조례로 교실이 이념교육에 빠져 폐지한다고 하지만 오히려 인권조례 폐지가 교실에 정치가 들어오게 만들었습니다. 사교육 카르텔을 잡겠다고 했지만 오히려 사교육을 키워준 제2의 수능 킬러문항 사태가 되어버렸습니다. 왜 인권조례가 없는 10개 시도에서도 교권 침해 문제가 빈번한지에 대해선 설명이 없습니다. 무조건 인권조례가 반대 정치진영의 산물인 것처럼 악으로 몰고 폐지했습니다. 폐지에 찬성한 시의회 의원들도 학생 인권보다 총선 다음에 있을 지방선거에 더 신경을 쓰는 모습입니다.
하지만 인권조례폐지로 다시 학교에 권위주의 문화를 들어오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 체벌과 과잉 규율이 넘치던 시절의 학교로 돌아 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참에 조례대신 ‘학생인권법’제정도 타당해 보입니다. 물론 교사들의 학생 지도와 교육 활동 보호도 법에 담겨야 합니다. 무엇보다 교사와 학생은 사랑과 신뢰의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저 옛날 예수와 따르던 제자들의 관계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이번 <사제의 눈>은 교사와 학생의 사랑의 관계가 무엇인지 말해주는 시이며 기도인 글 일부를 바치며 마치려고 합니다. 김수영 시인이 쓴 ‘교사의 기도’입니다. “오, 주님 / 제가 교실에 들어갈 때에 / 저에게 힘을 주시어 / 유능한 교사가 되게 해주소서. / 가르치면서도 배우게 해 주소서 / 모든 지식을 다 갖추고 있더라도 /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사오니 /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을 / 배워 알게 해주서./ 주여, 마지막으로 제가 받을 보상은 여기서가 아니라 / 저 세상에서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소서. / 이 땅 위에서 당신을 빛낼 공로로 / 제가 가르친 학생들과 함께 / 저는 천국에서 별처럼 빛나리라는 것을 / 알게 해주소서. /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