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민주화 운동으로 맞이한 ‘87년 체제’가 올해로 38년을 맞이합니다. 대통령 직선제와 소선거구제를 바탕으로 한 국회의원 선출과 지방자치제를 뼈대로 하는 87년 헌법은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자랑입니다. 제6공화국의 헌법 질서, 일명 ‘87년 체제’를 바탕으로 정권교체는 평화롭게 이루어졌습니다. 세계 각국은 대한민국을 민주주의 선진국으로 불렀습니다.
하지만 독재자를 몰아내고자 했던 제왕적 대통령은 역설적으로 대통령 자신을 스스로 파멸로 이끌었습니다. 대통령은 탄핵으로 임기를 마치거나 퇴임 후에 수사를 받았습니다. 영부인을 비롯해 대통령 친인척과 주변에는 부정부패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지지율이 하락한 대통령은 통합의 중심이 되지 못하고 진영 간 증오정치에 몰두했습니다. 정치는 주술과 같은 유튜버들에게 휘둘렸습니다. 87년 체제로 독재자를 몰아냈는데, 독재자가 쫓겨난 자리에는 민주주의의 가면을 쓴 제왕이 자리했습니다. 그 제왕적 대통령제의 절정이 윤석열 대통령이 일으킨 불법 계엄입니다.
또한, 1997년 IMF 사태로 마련된 경제 모델도 올해로 28년을 맞이합니다. IMF로 시련을 겪었지만 한국 경제는 한 단계 도약했습니다. 한국 경제의 체질은 정부 주도의 ‘계획 경제’에서 기업 중심의 ‘자유 시장 경제’로 체질이 변했습니다.
마침 개방화되고 자유화된 국제질서 속에서 ‘97년 모델’인 한국 경제는 빠르게 성장했습니다. 세계 곳곳에서 ‘메이드 인 코리아’ 즉 한국 기업의 상품과 광고를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K-팝과 K-드라마를 비롯해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세계화 시대, 대한민국의 성장 엔진이던 ‘97년 경제 모델’은 그 수명을 다하고 있습니다. 높은 성장을 자랑하던 경제성장률은 올해 1를 넘어 미래 0대로 추락할 것이라는 예측입니다. 내용을 들여다보면 더 참담합니다. 성장의 과실은 일부 수출 대기업에 집중되었지, 국내로 들어오는 ‘낙수효과’는 사라졌습니다.
중소기업과 자영업의 내수 시장은 황폐해졌습니다. 빈부격차는 더 벌어지고 불평등은 구조화됐습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갈라진 노동시장으로 고용·소득 격차도 심해졌습니다. 자국 중심의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은 수출 중심인 한국 경제의 먹구름입니다.
수명을 다한 ‘87년 정치 체제’와 ‘97년 경제 모델’은 대한민국의 미래 세대를 희망이 아닌 절망으로 이끌고 있습니다. 내일의 희망으로 들떠야 할 청년들은 부동산 영끌과 코인과 같은 투기에 몰두합니다. 눈치 빠른 청소년들은 의대 입시에 목메고 있습니다. 출산율은 곤두박질치고 올해부터 한국은 고령사회를 넘어 초고령사회로 진입합니다. 절망에 빠진 청년들은 장애인과 여성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혐오로 불행의 원인을 찾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멈출 수는 없습니다.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아직은 미약하지만, 개헌을 비롯한 사회 곳곳에서 들려오는 사회대개혁의 목소리는 변화의 시작입니다. 그 희망의 순례에 교회도 함께합니다. 언제나 교회는 변화를 희망하는 이들의 자리였습니다.
87년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며 명동성당으로 피신했던 시위대는 민주주의가 실현된 공화국을 꿈꾸었습니다. 97년 금 모으기 운동 등 시대의 아픔에 동참했던 교회는 우는 이들과 함께 울었습니다. 교회는 희망의 순례자로서 변혁을 꿈꾸는 이들의 피난처, 야전병원이었습니다. ‘87년 정치 체제’와 ‘97년 경제 모델’을 넘어서는 새로운 희망에 교회도 함께할 것입니다.
오늘 [사제의 눈] 제목은 <탄핵 다음은 사회대개혁>입니다. 절망을 희망으로 변화시켜 주시는 하느님의 놀라우신 힘을 믿으며 우리 공동체가 한 단계 더 도약하는 올 한 해가 되길 기도합니다. 평화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