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교구 1947년 선종, 1984년 발행 교구 총람에 오기 ‘원(垣)’ ‘항(恒)’ 비슷해 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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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박원영(프란치스코, 1909~1947) 신부가 교회가 발행하는 사제 인명록을 비롯한 여러 문서에 ‘박항영’으로 잘못 기록돼 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이름 첫 글자인 ‘담 원(垣)’자가 ‘항상 항(恒)’자와 비슷해 생긴 일로 추정된다.
1월 7일 현재 서울대교구 홈페이지 ‘선종 사제’ 명단과 주교회의 ‘2024 한국 천주교회 사제 인명록’을 보면, 박항영(朴恒英) 신부가 1936년 3월 28일 사제품을 받고 1947년 1월 18일 선종했다고 기재돼있다. 서울대교구 주보 역시 1986년부터 매년 ‘이번 주 기억할 선종 사제’를 알리며 박항영 신부로 소개해왔다.
하지만 서울 용산 성직자 묘지(용산성당 성직자 묘역) 내 묘비에 새겨진 이름은 ‘朴垣英’(박원영)이다. 박 신부가 황해도에서 사목하던 1938년 조선총독부 관보에도 ‘朴垣英’이라 쓰여 있다. 황해도 신천본당 주임 바로 후임인 구천우(1897~1994) 신부도 회고록에서 “전임 박원영 신부”라고 밝히고 있다. 1985년 출간된 단행본 「한국가톨릭대사전」에도 박원영 신부로 기록됐다. 이어 1993~2006년 13년에 걸쳐 완간된 「한국가톨릭대사전」(전 12권)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박항영’이란 오기(誤記)는 언제 어디서 시작됐을까. 첫 등장은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인 1984년 발행된 「서울대교구 교구총람」.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인 1981년부터 3년간 작업한 결과물이다. 이 책을 보면, 앞부분 ‘화보’ 면에 사진과 함께 ‘朴恒英(박항영)’이라고 적힌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어지는 본문 내용과 사제 명단에는 ‘朴垣英(박원영)’이라고 맞게 쓰인 점으로 미뤄볼 때, 한자를 옮겨적는 과정에서 발생한 실수로 보인다.
문제는 총람 화보가 이듬해 서울대교구가 펴낸 「성직자 사진첩」에 실리면서 오기까지 동반됐다는 것. 그 결과 이를 인용한 ‘첫 한국인 성직자 계보’에도 박원영이 아닌, 박항영으로 표기되고 말았다. 이기명(서울대교구 원로사목자) 신부가 1999년 엮은 「한국인 가톨릭 사제 서품자」에는 제2판(2000년)까지 ‘박항영’이라고 적혀 있다가 제3판(2006년)에서야 ‘박원영’으로 수정됐다. 하지만 서울대교구와 주교회의는 사제 인명록에 이런 교정을 반영하지 않았고, 그래서 계속 ‘박항영’으로 써온 것으로 추정된다.
반면 교회사 연구가 이순용(마르코)씨가 2005년 출간한 「한국 천주교회 사제 수품록」에는 ‘박원영’으로 제대로 나온다. 그가 2011년 펴낸 「사제 수품 오르도」 역시 마찬가지다.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조한건 신부도 “자료를 찾아보고 박항영이 아니라 박원영 신부가 맞음을 확인했다”며 “오기된 이름과 정보에 대해서는 잘 살피고 바로잡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1909년 12월 12일 경기도 광주군(현 광주시) 도척면 상림리에서 태어난 박원영 신부는 1936년 황해도 장연본당 보좌로 사목을 시작했다. 1938년 황해도 신천본당 주임과 1941년 충남 당진본당 주임을 역임한 그는 1947년 지병인 폐병이 악화해 38세 젊은 나이로 당진에서 선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