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워낙에 머리가 나빠 계산이 빠르지 못했습니다. 산다는 것이 수학 문제를 풀어야 하는 숙제처럼 고민스러웠어요. 생각해 보니 머리 좋은 사람은 어렵지 않을 문제인데도 내겐 왜 그렇게 어렵게만 느껴졌는지, 머리가 나쁘긴 확실히 나쁘다는 걸 다시 인식합니다.
그러다가 남편이 파킨슨을 데리고 오면서 그만 수렁에 빠지고 말았지요. 마치 네 살 먹은 장애아처럼 느껴졌어요. 그렇게 십여 년이 넘게 살았습니다. 간단한 문제 앞에서도, 기쁨조차도, 즐거움조차도 그의 아픔의 반을 나눠 지고 살았습니다. 칠십 년을 넘게 살아온 내 등도 척추관 협착증으로 휘어져 있는데 그 무게가 참 많이 무거웠습니다.
어느 순간 죽음을 붙잡고 씨름하는 내가 보였습니다. 샅바를 잡고 넘어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면서 쓰러지면 죽겠다는 절망감이 보였습니다. 고통스러울 남편보다 내가 먼저 더 걱정스러운 극히 이기적인 인간의 속성이 가소롭기도 해서 그것이 또한 괴로웠습니다. 두 개의 콧구멍에 산소와 유동식 줄을 꽂고 그 줄을 뽑을까 봐 두 손이 묶인 채 살아가는 남편의 모습을 마주하는 일은 제겐 고문이었어요.
맥없이 시간을 보낼 수 없는 조급함을 다스리려 톨스토이의 중편소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읽으며, 일리치가 오랜 고통 끝에 ‘죽음은 빛이다’라고 깨달았던 처절한 앎이 내게 화살처럼 와서 박혔습니다. 그러다가 죽음을 맞이하게 됐고 이별이 왔습니다.
슬픔보다 자유를 느꼈습니다. 긴 터널 속에서 빠져나와 햇빛 쨍한 산과 들이 눈앞에 아름다웠습니다. 이반 일리치에게 빛이어야 할 죽음이 산 자에게도 빛이라는 걸 깨닫는 순간이었습니다. 그 절박한 순간에 왜 나는 하느님이 주신 선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교만한 마음이 아니었는지 주님 앞에 앉아 통회합니다. 그러면서도 이 평온함은 숨길 수 없는 진실입니다. 그것이 죄라면 주님, 용서하여 주십시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짧은 내 인생. 이젠 구구단 외우듯이 쉽게, 진지하지 않게, 그동안 참았던 웃음보따리 풀어 맘껏 웃으면서 미쁘게 살다 가렵니다. 당신께서 용서해 주신다면.
글 _ 김정희 가타리나(수원교구 죽전1동본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