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은 상품이나 재화가 아니라 인간의 기본권인 ‘인권’이다. 이런 인식이 제도로 자리 잡은 것은 1900년 전후 유럽이었다. 자본주의의 발달과 도시화로 슬럼과 과밀주거가 확산하자 영국·프랑스·독일·네덜란드·오스트리아 등은 주택을 시장에만 맡길 수 없다고 판단하고 잇달아 ‘주택법’을 제정했다. 공공과 비영리 기관이 공공임대주택과 사회주택을 직접 공급하도록 법적 근거를 마련하고, 임대료 상한과 세입자 보호 장치를 제도화했다. 주택법은 집을 ‘재화’가 아닌 ‘사회 인프라’로 올려 세운 출발선이었다.
그 결과 유럽 도시의 상당 부분은 사회주택과 공공임대로 채워졌다. 세계에서 가장 살고 싶은 도시로 늘 손꼽히는 오스트리아 빈의 시민 중에는 자가주택 거주자보다 임대주택 거주자가 훨씬 많다. 유럽의 대부분 임대주택은 사실상 평생 임대다. 세입자가 원하지 않는 한 쫓겨나지 않고, 임대료는 법으로 정해져 급등하지 않는다. 임대는 임시 거처가 아니라 정상적인 삶의 방식이며, 사회주택은 사회적 약자들만이 아닌 중산층까지 아우르는 보편적 주거 시스템이다.
우리 현실은 어떤가? 정반대다. 한국의 임대주택은 대부분 기한부 주거다. 민간 임대는 말할 것도 없고 공공임대도 대부분 5년, 10년으로 기한이 정해져 있다. 임대료는 시장 논리에 맡겨져 갱신 때마다 급등할 수 있다. 임대는 삶의 터전이 아니라 한시적 대기 공간이다. 불안하기 짝이 없는 위태로운 집이다.
이런 불안은 “영혼까지 끌어 빚을 내어 집을 사라”는 ‘영끌’과 “얼어 죽어도 신축”이어야 한다는 ‘얼죽신’이란 프레임을 낳았다. 집은 삶의 기반이 아니라 인생을 걸어야 할 투자 대상이 되었다. 역대 정부 정책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예외 없이 ‘공급론’에 매달리며 ‘자가 보유율’로 성과를 평가했고, 임대는 소유 이전 단계로만 취급했다. 임대주택 수는 늘었지만, 비중은 여전히 한 자릿수에 머물러 있다. 임대를 안정적인 삶의 방식으로 만드는 데는 실패했다.
이제 목표를 바꿔야 한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집을 가졌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사 걱정 없이 안심하고 오래 살 수 있는가?”가 기준이 되어야 한다. 공공임대·사회주택 비율을 높이고, 단기 계약 중심의 임대차 제도를 장기 임대 구조로 전환해야 한다.
임대 주택을 공급하는 방식도 바꿔야 한다. 신도시와 대단위 재개발·재건축 등 ‘대규모 개발 방식’ 대신, 빈집·빈상가·빈사무실을 집으로 고쳐 쓰는 ‘소규모 재생방식’으로 임대주택을 확대해야 한다. 서울 SH공사가 추진했던 ‘연리지’와 ‘누리재’처럼 노후화된 저층주택을 공공에서 매입해 쾌적한 주택으로 갱신해, 원 거주자들은 거래 차액을 연금으로 받으며 새집에서 평생 살아가고, 추가된 주택을 청년과 신혼부부들에게 임대하는 좋은 대안이 많다.
주거정책은 인구·가족정책과도 결합해야 한다. 신혼부부에게 부담 없는 임대주택을 제공하고, 아이 수에 비례해 임대 기간과 평형을 10년씩, 10평씩 늘려주는 ‘다신공(다자녀 연계 신혼부부 공공임대주택)’ 같은 모델을 제도화해야 한다. 아이를 낳을수록 집 걱정이 줄어드는 구조가 만들어져야 저출생의 해법도 열린다.
전셋값이 오를까 밤잠을 설치는 청년과 신혼부부, 계약 만료 때마다 짐을 싸는 세입자들까지 집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들이 많다. 우리의 절박한 주거 현실을 바라보며 가만히 묻게 된다. 청년 예수가 오늘 대한민국에 산다면 집을 가질 수 있었을까?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루카 9,58)는 말씀처럼, 예수께서 지금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면 거처를 잃고 존엄이 흔들렸을지 모른다.
집은 소유의 성취가 아니라 함께 지켜야 할 인권이다. 집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라, 생명이 태어나고 사랑이 자라는 존엄한 자궁이다. 집은 상품도 재화도 아닌 인간의 기본권 곧 인권이다. 집에 대하여 다시 묻는 것이야말로 오늘 우리가 응답해야 할 가장 절실한 신앙의 질문이다. ‘집’은 과연 무엇인가?
글 _ 정석 예로니모(서울시립대 도시공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