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2월 17일
사람과사회
전체기사 지난 연재 기사
[독자마당] 이어짐의 자리에서

폰트 작게 폰트 크게 인쇄 공유

올해 추석, 나는 한 분의 죽음을 곁에서 지켜보며 삶과 죽음의 의미를 깊이 사유했다. 그분은 명문대를 졸업하고 대기업 임원으로 재직하다 은퇴하신 분이었다. 네 명의 자녀를 훌륭히 키워내며 성실한 삶을 살아오셨다. 남들의 눈에는 더할 나위 없는 성공과 행복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분이 마지막으로 남긴 선택은 그 모든 성취보다 더 깊은 울림을 남겼다. 


그분은 자신의 시신을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에 기증했다. 천주교 용인공원 묘원에서 열린 연미사. 가을 부슬비가 신발을 적시고, 벌개미취가 손을 흔들며 참사랑 묘역을 감싸고 있었다. 잔잔한 바람이 기도 사이를 흘러 다니는 듯했다. 가족들은 고인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했고, 나는 한참 동안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죽음은 끝이라 하지만, 그분의 죽음은 오히려 ‘이어짐’이었다. 그의 몸은 떠났지만, 누군가의 배움과 생명 속에서 다시 살아나고 있었다.


시신 기증자는 참사랑 묘역에 모셔지고, 매년 위령 성월이면 가톨릭대 의과대학 학생들이 모두 찾아와 연미사를 바친다. 이로써 고인은 지속적인 돌봄과 기도를 받게 된다. 가족들은 장례 절차만 마치면 그 돌봄의 시간에 함께 참석하면 된다. 죽어서도 자녀들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는 그 마음. 그것이야말로 부모의 가장 깊은 사랑이 아닐까.


나의 기억 속에도 그와 닮은 첫 경험이 있다. 간호대학 1학년 시절, 입학하자마자 맞이한 첫 수업은 해부학이었다. 그때 나는 아무런 준비도 없이 해부학 실습실 문을 열었다. 희미한 조명이 비추는 흰 천 아래, ‘스승’이라 불리던 무언의 선생님을 마주했다. 교수님의 인도 아래, 우리는 잠시 묵념을 올렸다. 고요한 얼굴 앞에서, 내 마음은 낯선 두려움과 경외심으로 뒤섞였다. 처음으로 인간의 ‘몸’이라는 신비를 마주했을 때, 나는 비로소 ‘생명’이 얼마나 덧없고, 또 얼마나 성스러운 것인지를 깨달았다.


해부학 실습을 마친 후, 의사는 고인의 시신을 정성스럽게 봉합하며 마지막 인사를 드렸다. 그분은 이름 없는 선생님이었지만, 내게는 영원히 잊히지 않을 첫 번째 ‘환자’이자 ‘스승’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알게 되었다. 의료인의 길은 누군가의 희생 위에서만 걸어갈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을. 누군가는 자신의 마지막을 내어주어야, 또 다른 누군가가 생명의 의미를 배워간다는 것을.


백세 시대라 불리는 지금, 우리는 육신을 위해 수많은 시간과 노력을 바친다. 좋은 음식을 찾아 먹고, 영양제를 챙기며, 운동과 관리에 정성을 쏟는다. 하지만 문득 되묻게 된다. 나는 내 영혼을 위해서도 그만큼의 시간을 쏟아왔는가? 믿음 안에서 죽음은 끝이 아니다. 육신은 흙으로 돌아가지만, 영혼은 하늘로 되돌아간다. 우리는 흙에서 왔고,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순환 속에 존재한다. 그러나 그 흙이 누군가의 배움과 기도의 밭이 된다면, 그것은 결코 ‘소멸’이 아닐 것이다.


오늘날의 장례 문화는 빠르게 변하고 있다. 매장 대신 화장, 납골당 대신 자연장으로, 죽어서도 자연과 자식들에게 부담을 남기지 않으려는 흐름이 점차 자리 잡고 있다. 죽음을 ‘돌봄’의 연장으로 받아들이는 문화, 그 속에서 우리는 인간의 품격과 겸허를 다시 배우게 된다. 


죽음을 바라보는 일은 언제나 어렵다. 그러나 그것을 외면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할 때, 비로소 우리는 ‘삶’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된다. 그분의 결정은 아마도 오랜 고민과 인간적인 고뇌 끝에 내린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선택은 한 사람의 죽음이 또 다른 수많은 생명을 비추는 등불이 되었다는 점에서, 누구보다 찬란했다.


삶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모양을 바꾸어 이어질 뿐이다. 누군가의 가르침으로, 누군가의 손끝의 떨림으로, 누군가의 기도로. 그날 묘역의 벌개미취가 부드럽게 흔들리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비는 그치지 않았고, 공기에는 흙내가 가득했다.


죽음은 결코 끝이 아니며, 사랑은 육체를 넘어 이어진다는 것을. 그분의 고요한 선택 앞에서 나는 다시 한번 우리 모두에게 묻는다. 우리는 오늘, 어떤 ‘이어짐’을 남기며 살고 있는가라고.


글 _ 노강 아가타(서울대교구 한강본당)



[기사원문보기]
가톨릭신문 2025-12-17

관련뉴스

말씀사탕2025. 12. 17

이사 49장 6절
나의 구원이 땅 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
  • QUICK MENU

  • 성경
  • 기도문
  • 소리주보

  • 카톨릭성가
  • 카톨릭대사전
  • 성무일도

  • 성경쓰기
  • 7성사
  • 가톨릭성인


GoodNews Copyright ⓒ 1998
천주교 서울대교구 · 가톨릭굿뉴스.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