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한 고향길, 집으로 가는 도중, 방향을 바꾸려 큰 몸체를 움직이는 트럭 하나와 뒤에서 쫓아 오던 승용차 사이에 끼어 어디로 가야 할지 잠시 난감한 상황에 맞닥뜨린 적이 있다. 짧은 순간이었으나 초 디지털화되어 가는 시대 안에서 어디에 마음을 둬야 할지 모르는 우리 시대를 반영하는 것 같아 잠시 상념에 빠졌다.
출산율 저하로 국가 소멸 위기에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 경제성장을 도모하며 인공지능(AI) 선도 국가로 발돋움하려는 움직임 안에서 재생 에너지 문제와 노동시장 안에서의 인간 소외나 그에 따른 윤리 문제 등에 관한 심도 있는 논의도 개진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역사는 어떻게 진보하고 왜 퇴보하는가에 대한 세계사적 흐름을 짚어 보는 논의도 있다.
우리를 둘러싼 이러한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진단 안에서도 한 발 더 들어가 삶의 본질적 질문을 던져보면, 가장 기초가 되는 의식주 생활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크게 변화됨 없이 인간 노동을 필요로 한다. 여전히 밥 짓고, 파와 마늘을 다듬어 살림을 산다. 디지털 문화가 손안으로 들어와 있어도 사람은 정성을 다해 일상을 살며 기도하고 고통을 직면한다. 기본권이 박탈당했을 땐 아낌없이 투쟁해 그것을 다시 성취하려 온몸으로 저항하여 바른길을 내기 위해 함께 연대한다.
쉽게 변화되어 가는 이 시대는 계승하고 싶은 아름다운 가치에 적응하기도 전에 또 다른 것들이 밀려와, 머물면서 존재를 들여다보고 나는 누구이며 세상은 어떻게 움직여지는지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던지며 사유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듯 초고속으로 지나가 버린다. 그러나 여전히 수녀원에서 하느님 현존 안에서 근원을 향해 침잠해 착복, 첫 서원, 종신서원을 준비하는 수도자들의 모습에서는 그 옛날 사막에서 수도하기 위해 머물던 은수자들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을 목격하게 된다.
행성 지구가 금방이라도 사라질 듯한 전 지구적 차원의 긴급한 사안들 안에서도 늘 새로운 희망은 스며든다. 단적으로 하느님의 강생, 이 어마어마한 사실 앞에서 우리가 어찌 희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한 말씀으로 모든 것을 있게 하신 창조주, 임마누엘 하느님께서 취약한 아기로 탄생하신 그 신비를 믿고 고백하며 살아가고 있는데 어찌 희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얽히고설킨 문제들, 예측할 수 없는 시간 앞에서 우리는 늘 처음으로 돌아가 거기서 다시 내가 누구인지를 물어야 한다. 거기서 다시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을 점검하고 신발을 고쳐 신어야 한다.
희망은 있다. 희망 안에서 다시 우리 사람만의 고유한 춤사위를 만들어 갈 수 있다. 신앙이 주는 기적, 그렇다. 우리에게는 애써 지켜내야 할 소중한 가치들을 함께 보존할 기도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2012년, 홀로 죽어가다 뇌사 판정을 받은 프랑스의 어린 메일린을 살려낸 기적 이야기를 익히 들은 바 있다. 가족과 메일린의 언니가 다니던 학교의 학부모는 19세기 교황청 전교회를 설립한 폴린 자리코의 전구를 청하며 간절히 기도했다. 이들이 만들어낸 기도의 기적이 우리에게는 아주 오래된 새 희망의 표지가 아니겠는가. 매일 꾸준히 기도하며 걸어 온 이 신앙의 길을 내일도 여전히 희망하며 걸어가는 것에 우리의 미래가 있지 않겠는가.
레오 14세 교황에 의해 올해 11월 교회 학자로 선포된 성 존 헨리 뉴먼 추기경(John Henry Newman, 1801~1890)이 쓴 시의 일부로 이 은혜로운 성탄의 빛 안에서 한 해를 마무리하는 우리의 존재를 주님께 봉헌한다.
“이끌어 주소서, 온유한 빛이여, 이 암울한 세상 한가운데서 저를 인도하소서. 밤은 깊은데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사오니 저를 인도하소서. 제 발걸음을 지켜주소서. 먼 곳을 보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한 걸음만 밝혀주시면 족하겠나이다.”
글 _ 이은주 마리헬렌 수녀(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 그동안 ‘방주의 창’을 집필해 주신 이은주 수녀님, 나승구 신부님, 최진일 교수님, 정석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