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원섭의 나무와 숲 이야기] (21)외로운 세월 꿋꿋히 견뎌낸 은행나무
46억 년 전 지구가 탄생한 이래 수없이 많은 식물이 생겨나고 또 멸종을 거듭해 왔다. 그렇다면 현존하는 나무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나무는 무엇일까도 궁금하다. 식물학자들에 의하면 은행나무가 3억 5000만 년 전인 고생대 석탄기 초기에 나타나 공룡이 번성했던 중생대를 거쳐 현재까지 생존하고 있다고 추정한다. 그래서 은행나무를 ‘화석식물’이라 부른다. 우리가 흔히 마주치는 은행나무가 공룡이 뛰놀던 광경을 목격한 나무라니 참 놀랍다.
이런 오랜 역사가 있음에도 은행나무를 보면 안쓰럽다고 생각한다. 먼저 제대로 된 이름부터 갖지 못했다. 은행(銀杏)나무, 곧 은빛 나는 살구나무란 뜻이다. 열매가 살구와 비슷하지만, 은빛이 난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영어 이름은 ‘Maiden hair tree’라고 하는데 은행잎이 마치 소녀의 머리꼬리 같다 하여 붙여졌다 한다.
이렇게 오랜 세월을 살아온 은행나무이지만 아직 활엽수인지 침엽수인지 정체도 불분명하다. 사정을 잘 모르는 독자들은 은행잎이 넓은데 무슨 침엽수냐 할 것이다. 식물들은 종자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겉씨(被子)식물과 속씨(裸子)식물로 나뉘는데 소나무와 같은 침엽수는 겉씨이고 활엽수는 속씨이다. 그런데 은행은 침엽수와 같은 겉씨라서 침엽수라는 주장이다. 그래서 학자들은 은행나무의 정체성에 대해 아직도 논쟁을 이어가고 있다.
은행나무는 우리가 잘 아는 것과 같이 열매를 맺는 암나무와 그렇지 않은 수나무가 있다. 이맘때쯤 나무에 달린 은행이 길에 떨어져 아주 고약한 냄새가 나는 것을 맡아봤을 것이다. 그래서 어느 지자체에서는 멀쩡한 암나무 가로수를 베어내기도 한다는 뉴스를 보았다. 은행나무의 처지에서 보면 자신의 생존과 후손의 번식을 위해 전략적인 냄새를 풍기는 것인데, 사람들이 싫어한다고 베어버리니 얼마나 억울한 일일까.
오랜 역사를 가진 나무답게 은행나무의 수명은 매우 길다. 그래서 천연기념물로 지정되거나 노거수로 지정된 나무 중에서 은행나무가 으뜸을 차지한다. 그중에 가장 유명한 것을 꼽으라면 양평 용문사에 있는 천연기념물 30호인 은행나무를 말하고 싶다. 신라의 마의태자가 망국의 슬픔을 안고 금강산으로 들어가기 전 심었다고도 하고, 의상대사가 지팡이로 쓰던 나무를 꼽아서 자랐다는 전설도 있다. 나이는 1100살, 높이는 42m가 넘으며 은행나무로는 처음으로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안동 용계리에 있는 은행나무도 얘깃거리이다. 1990년 당시 임하댐이 건설되면서 물에 잠기게 되자, 당시 돈으로 12억 원을 들여 가산을 조성하고 올려 심어 은행나무를 살렸다 해서 가장 돈을 많이 들인 나무로 회자되었다.
은행나무는 가을에 금빛의 단풍을 뽐내며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그래서 이때쯤 은행나무 숲이나 가로수가 있는 곳은 사람들이 많이 찾는 명소가 된다. 아산 현충사, 괴산 문광저수지 등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곳이 있다. 은행나무 명소 하면 빠질 수 없는 곳이 강원도 홍천 은행나무숲이다. 서울에서 사업하던 유기춘 선생이 만성 질병에 시달리던 아내를 위해 홍천에 내려와 정착하여 직접 만든 농장인데 매년 10월에 단 한 달만 일반인들에게 무료로 개방한다. 전국에서 많은 관광객이 은행나무 숲을 찾고, 이 마을에서는 농산물 장터도 열어 지역 경제와 주민들의 소득에 기여하는 아름다운 숲이라 생각된다.
3억 5000만 년이라는 오랜 세월을 살아온 은행나무지만 가계를 따져보면 1과 1속의 일가친척도 없는 혈혈단신 아주 외로운 나무이다. 오랜 세월 외로움을 견뎌내고 묵묵히 서 있는 은행나무를 바라보며 일희일비하는 내 마음을 다스려본다.
신원섭 라파엘
충북대 산림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