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올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께
안녕하세요. 저는 지난 편지를 읽으면서 진심으로 겸손을 산다는 것이 참으로 어렵게 느껴졌습니다. 낮은 자리로 내려가는 순간에도 누군가 알아주길 바라고, 뒷자리에 가면서도 앞으로 불러주길 바라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겸손해지려 노력하는 순간에도 그 겸손을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이요. 저만 그럴까요? 어떤 상황에 있든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너무 간절하거든요. 무소유로 덕망이 높은 법정 스님도 가장 힘들었던 것이 인정받고 싶은 욕구를 내려놓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렇기에 김수환 추기경님께서도 그 욕망의 끈을 내려놓으려 스스로 바보가 되려고 부단히도 애쓰셨나 봅니다. 수도자이기에 신앙인이기에 겸손은 기본이며 으뜸이 되어야 하는 덕이라는 것을 인지하고는 있습니다. 그런데요. 타인의 힘으로 낮춰진다고 느낄 때 올라오는 저의 감정, 바로 굴욕입니다. 모멸감과 수치심까지 총동원되고, 억울함과 분노까지 밀려오면 감당하기 어렵답니다. 그런 저 자신을 보고 또 자책하게 되고요. 그러고 보면 겸손(humble)과 굴욕(humiliate)은 참으로 묘한 교차점이 있네요. 어원인 땅(humus)은 발아래 내려가 밟힐 수도 있는 존재라는 의미인데요. 결국, 생명의 근원인 흙과 하나가 되어야겠지요?
겸손에 대한 성인의 지혜를 배우고 싶은 김 수녀 드립니다.
사랑하는 김 수녀와 독자들에게
겸손은 우리 인간이 살아가는 가장 기본이며 근본이 되는 덕행입니다. 겸손은 하느님의 넘치는 은혜에 비해 우리 자신이 얼마나 미약한지 인정하는 것이고요. 그런 진실을 신앙으로 고백하여 삶으로 구체화하는 것이 겸손이지요. 우리는 모두 하느님께 속해있다는 것을 겸손으로 드러냅니다.
그래요. 겸손과 굴욕은 발아래로 내려간다는 점에서 유사하고 또 함께 있어야 해요. 한마디로 말하자면 겸손은 굴욕을 품는 행위에요. 누군가에 의해 모멸감과 굴욕감을 느낄 때, 그것을 품을 수만 있다면 진짜 겸손이겠지요. 악어는 상대가 겁에 질리거나 도망치면 인정사정없이 물어뜯는다고 해요. 굴욕감은 악어와 같아서 두려움과 저항이 클수록 독사의 독처럼 빠르게 번져 나를 지배하고 맙니다. 그럴 때 마음을 가다듬고 침묵과 기도로 버티어내야 해요.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굴욕의 독소가 스스로 소멸함을 경험할 수 있어요.
당연히 굴욕이란 감정은 수치심과 모욕감을 동반하면서 죽기보다 더 힘들 수 있어요. 그런데요. 도망갈수록 더 나락으로 떨어지게 돼요. 그럴 때일수록 버티고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면서 스스로 그 굴욕을 기꺼이 끌어안아 보세요. 처음엔 어렵겠죠. 하지만 하다 보면 어느 순간 기쁘게 품어 안게 돼요. 그러면 완벽한 겸손의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어쩌면 생각보다 쉬울 수도 있어요. 할 수 있다고 자신을 믿고 진심으로 그렇게 되길 바라고 기도한다면요.
어떤 수도자들이 다 해진 옷으로 추위에 떨기도 해요. 그러면 세상 사람들은 그들을 존경하고 경의를 표하겠지요. 그런데 똑같이 다 떨어지고 해진 옷을 입은 가난한 노동자나 노숙자들에겐 멸시와 조소를 보내는 경우도 있어요. 다 해진 옷을 입고 수도자들이 걸인들에게 가지 않고 멋진 옷을 입은 사람들 틈에 있으면 더 눈에 띄고 더 큰 명성을 얻을 수도 있어요. 이상하지요? 똑같이 낡은 옷인데 수도자가 입으면 존경을 받고 걸인이 입으면 굴욕을 얻어요. 그러니까 비천함으로 인한 고통도 천한 것이 있고 명예스러운 것이 있는 거지요.
우리는 이런 명예스러운 고통은 잘 참아 받으면서 자부심을 얻게 돼요. 천한 고통은 모욕과 비웃음을 얻고 열등감을 얻게 되고요. 진짜 겸손은 바로 이 천한 고통을 적극적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실 명예와 지위는 발에 밟히면 더 튼튼해지고 더 풍성하게 자라는 꽃과 같답니다.
물론 우리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명성을 얻는 것은 결코 나쁜 것은 아니에요. 오히려 살아가는데 활력을 주는 ‘멋진 장식’일 수도 있어요. 자라는 어린아이들과 무언가 해보려는 영성 초보자들에게도 좋은 활력을 주니까요. 하지만 이런 명성을 지키기 위해 신경이 과민하고 불안해진다면 주의해야겠지요. 자칫 더 큰 명성에 집착하게 되기도 하니까요. 마치 큰 강 위에 허술하게 다리를 만들어놓고 비만 오면 불안에 떠는 것과 같아요. 점차 자신감은 줄어들고 나약해지겠지요. 그렇게 되면 더욱 의존할 명성을 찾아 헤매면서 더 큰 불안을 안게 되고요.
겸손은 자신의 비천함을 인식하고 이를 사랑하는 덕입니다. 이러한 겸손의 덕을 완벽하게 드러내신 분은 바로 성모님이시지요. “주님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로다.” 자신의 비천함을 천히 여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소중하게 여기고 기뻐하며 노래한 성모님이야말로 참된 겸손의 모범이십니다.
예수님으로 사세요! Live Jesus!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