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과연 나는 스스로 완벽히 겸손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겸손한 척하며 불편한 감정을 숨기고 있진 않을까. 그림은 렘브란트가 그린 걱정과 수심, 깊은 연민과 겸손, 침착한 지성의 모습을 보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상. 【CNS】 |
사랑하올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께
안녕하세요. 오늘은 한 청년의 질문으로 시작할까 합니다. “저는 열심히 최선을 다했는데 직장 상사에게 심각한 지적을 받았어요. 그때 어떤 감정인지 잘 몰랐는데 생각해보니 ‘굴욕감’이었던 거 같아요. 그런데 살레시오 성인께서 굴욕감도 끌어안으라고 했는데 그게 안 돼요. 그래서 더 괴롭습니다. 역시 전 겸손하지 못한 것일까요?” 순간 성인의 말씀은 희망을 주기도 하지만 ‘절망도 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다고 당황하시지는 마세요. 각자는 위치와 상황에 따라서 주어진 메시지를 이해하니까요.
그렇기에 행간 속에 숨겨져 있는 의미를 새 부대에 담아서 지금 여기에서 각자에게 맞는 처방이 되면 참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가끔은 성인들의 말씀이 박물관에 있는 박제된 유산처럼 느껴질 때도 있으니까요. 지금, 여기에서 나에게 어떤 말을 건네고 있는지 끊임없이 교감이 이루어져야겠지요.
젊은이의 질문이 저에겐 또 하나의 의문을 갖게 했습니다. ‘겸손’이란 덕이 지금 저희가 사는 세상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것도 자신의 비천함을 인식하고 굴욕감을 품고 적극적으로 기쁘게 끌어안으라는 성인의 말씀이 얼마큼 공감을 불러일으킬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저희에게 ‘겸손’에 대한 지혜를 한 번 더 나눠주시기를 바랍니다.
성인의 덕을 닮고 싶은 김 수녀 드립니다.
사랑하는 김 수녀와 독자들에게
세상은 겸손을 잘못 이해하는 경우가 있어요. 사회적 지위에 따라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자기 자신을 낮추는 외적 태도로만 쉽게 생각하지 않는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자신을 낮추면 무시 받을 거로 생각해요. 그렇기에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쉽게 거만해지고 자기만족에 빠지게 되기도 하지요.
굴욕감을 끌어안을 수 없어 괴롭다는 청년의 성찰이 담긴 질문, 그리고 이 시대의 사람들이 과연 겸손의 덕에 대해 얼마나 공감하느냐는 김 수녀의 의문도 충분히 공감이 가요. 내가 살던 시대에도 겸손이나 온유를 덕행으로 보지 않으려 했으니까요. 오히려 무시하기도 했지요. 김 수녀가 사는 세상은 종교보다 트렌드를 따라가고 성인들의 덕행보다 유명인들의 사생활에 더 관심이 쏠린다고 하지요. 내가 살았던 세상도 다르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예수님의 가르침보다 사회의 풍습과 관습 그리고 세속의 정신이 더 우세했어요. 물론 자기애가 충만한 지금의 이 세상에서 자신을 낮추는 겸손을 산다는 것은 더 어렵긴 하겠지요.
청년의 질문으로 돌아갈게요. 누군가에게 받은 지적이 굴욕감을 느낄 정도로 힘들었다는 건데요. 그런데 묻고 싶어요. 그 지적받은 내용에 동의하는지요. 만약 동의할 수 없는데 “네, 알았습니다. 다음부터 조심하겠습니다”라고 했다면요. 그 굴욕감은 상대에서 온 것과 그런 말을 한 자신의 비굴함에서 온 것과 합쳐지면 굴욕감은 배가 되겠지요.
그런데 상대방의 말이 당장은 모욕적이고 수치심을 느꼈지만 맞는 말이라면 ‘네, 노력하겠습니다’라는 말은 진실한 것이겠지요. 그리고 더 완벽하다면 그런 지적이 오히려 기쁨이 될 수도 있어요. 그것을 저는 ‘완벽함’이라고 했습니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도달해야 할 성덕의 관문인데요. 물론 쉽지 않아요. 혹시 상대방의 태도에 대한 문제는 그 사람의 몫으로 남기면 어떨까요? 나의 것이 아니니까요. 오히려 상대에 대한 불편한 감정으로 스스로 자책한다면 교만일 수도 있어요.
겸손한 사람은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그만큼 더 용기를 얻게 돼요. 그리고 자신의 결점을 아는 데서 더욱 한 발 진보하게 되고요. 우리의 약함을 통해 주님께서 더 크게 일하시고 우리의 한계 안에서 주님의 자비하심을 드러내시기 때문입니다.
다시 강조하고 싶어요. 겸손은 ‘척’하는 외적 태도를 의미하지 않아요. 겸손의 말을 하지 않는 것도 겸손의 말을 하는 것도 내 마음과 일치하지 않는다면 ‘척’이겠지요. 낮은 자리에 앉기를 원하지 않으면서도 낮은 자리를 원했던 것처럼 행동하는 것도. 그리고 높은 자리로 가기 위해 낮은 자리를 이용하는 것도 모두 ‘척’이지요.
물론 상대방을 존중하기 위해 내키지 않는 행동을 할 수는 있어요. 그런데 그것이 나의 안일을 위해 나 자신의 성공을 위해서라면 ‘척’인 거지요. 사랑은 모든 덕행의 태양입니다. 사랑이 명령할 때만 덕행은 움직여요. 만일 겸손의 덕을 실행하는 데 사랑에 손상이 간다면 의심의 여지 없이 어리석은 척도 지혜로운 척도 하지 말아야겠지요.
예수님으로 사세요! Live Jesus!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