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에 나오는 자캐오는 소통과 친교의 부재, 그리고 그로 인한 외로움과 고독으로 고통받고 있었습니다. 단지 키가 작은 것만 문제였다면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가 예수님을 바라볼 수도 있었겠지만, 사람들에게 미움받고 배척당하며 마음이 잔뜩 주눅이 든 그는 누군가와 어울리며 부대끼는 게 싫었기에 따로 돌무화과나무 위로 올라갑니다. 거기서라면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누구도 신경 쓰지 않고 예수님을 마음껏 바라볼 수 있을 터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작은 체구로 돌무화과나무 위까지 올라간 것은 그저 타인에 대한 불편함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키가 작다는 핸디캡 때문에 예수님을 만날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겁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싶다는 간절함이, 그분을 만나 슬픔과 절망이 가득한 자기 삶에 의미를 더하고 희망을 찾고 싶다는 절박함이 ‘세관장’으로서 체면이 깎이는 일도, 사람들의 조롱과 손가락질도 기꺼이 감당할 수 있게 만들었던 겁니다.
예수님은 그의 마음속 갈망을 단번에 알아채십니다. 그리고 그에게 다가가셔서 그를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십니다. 예수님이 ‘위를 쳐다보신’ 것은 단지 자캐오가 물리적으로 더 높은 장소에 있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상대방보다 낮은 자리에 서서 그를 올려다보는 것은 그의 진면목을 하나하나 뜯어보고 내 안에 받아들이겠다는 적극적 수용의 태도를 드러냅니다. 이는 ‘이해하다’라는 뜻의 영어 동사 ‘understand’의 구조분석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지요. ‘understand’는 ‘~의 아래’라는 뜻의 전치사 ‘under’에 ‘서다’라는 뜻의 동사 ‘stand’가 합쳐진 말입니다. 즉 누군가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보다 낮은 자리에 서서 존중과 사랑의 마음을 담아 그를 꼼꼼히 살펴보아야 함을 뜻하는 겁니다. 예수님은 자캐오를 그렇게 바라보셨습니다. 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신 게 아니라, ‘나만 옳고 넌 틀렸다’는 편견과 고집으로 상대방을 함부로 판단하거나 단죄하신 게 아니라, 존중과 사랑의 마음으로 자캐오를 바라보시며 그를 있는 그대로 당신 안에 받아들이려고 하신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가장 감동적인 부분은 예수님께서 그의 이름을 불러주시는 대목입니다. ‘자캐오’라는 이름은 히브리어 ‘즈카르야’(Zechariah)에서 나온 말로 “하느님께서 기억하셨다”라는 뜻입니다. 주님은 그의 간절함을 알아보시고 구원해야 할 특별한 사람으로 기억하셨습니다. 자캐오가 그토록 갈망하던 이해와 용서를, 따스한 사랑과 자비를 선물하신 겁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당신 뜻을 따르려 노력하는 우리의 의지와 노력을 알아봐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하느님 아버지를 닮은 귀한 작품으로 기억해주시고 받아들여 주십니다. 자캐오가 당신을 맞아들였듯, 우리도 삶 안에 당신을 모셔 들이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자유롭고 기꺼운 마음으로 당신의 가르침과 뜻을 실천하여 하느님의 자녀로서, 참되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살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자캐오는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셔 들이면서 예수님의 눈으로 자기 모습을 바라보았습니다. 자신이 그동안 고수해온 삶의 방식이, 다른 이에게 피해와 상처를 입히면서 자기 배를 불려온 이기적인 모습이 큰 잘못임을 깨달았습니다. ‘세상의 일’보다 ‘하느님의 일’을 먼저 챙겼어야 했습니다. 자기가 가진 재물은 스스로의 욕심을 채우고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가난하고 굶주린 이웃을 돌보고 병든 형제를 보살피기 위해 나누고 베풀었어야 했습니다. 자캐오는 예수님을 자기 집에 맞아들이는 동시에, 그분의 가르침을 자기 마음에 받아들여 변화한 것입니다. 말로는 회개했다고 하면서 행동은 여전히 세상의 뜻과 욕망을 따라간다면 그건 참된 회개가 아닙니다. 내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사랑과 자비의 실천으로 드러내야 진정한 회개입니다. 그런 이들에게 구원의 은총이 내립니다.
함승수 신부(서울대교구 수색본당 부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