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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님 앞에 선 우리는 매사 겸양의 덕을 지니기 위해 늘 스스로를 돌아보는 습관이 필요하다. 【CNS】 |
사랑하올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께안녕하세요. 몇 년 전 우리나라에서 대기업의 공채시험에서 문제 하나가 논란이 된 적이 있었습니다. 언어논리 영역에서 최고의 난이도로 지목된 어휘였는데요. 바로 ‘겸양’이란 단어였지요. 놀라운 것은 많은 수험생이 난생처음 보는 단어였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의 ‘겸양’은 말 그대로 조용히 그림자처럼 뒷전에 겸손하게 머물러 있지 않나 싶습니다. 겸손과 겸양, 비슷한 듯하지만 미묘한 차이가 있는 것 같네요. 겸손은 상대방을 존중하면서 잘 드러나지 않는 묵직한 내적 덕행이라면 겸양은 외적 태도에서 조용히 양보하고 너그러운 정숙한 모습으로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겸양의 덕은 말하지 않아도 부드럽고 좋은 향기가 있는 거 같기도 하고요. 평소에 성인께서 겸손은 물론이고 겸양이란 덕행에 대해서도 많이 강조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겸양이란 단어조차 잊고 사는 저희에게 성인의 지혜를 들려주세요.
겸양의 덕을 배우고 싶은 김 수녀 드립니다.
사랑하는 김 수녀와 독자들에게아주 반가운 질문입니다. 별로 눈에 띄지 않지만 그윽한 향기를 풍겨주는 작은 덕행들이 많은데요. 그중에 겸양은 조용하지만 강력한 목소리를 냅니다. 그러니까 겸양은 외적 태도만으로도 감동을 주지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은 말없이 걸어가기만 해도 많은 젊은이가 그에게 배움을 청하려고 따라갔다고 해요. 그리고 설교도 하지 않고 정숙하고 겸허하게 수도원에서 살아가는 한 수사 신부에게 감동하여서 많은 사람이 그를 따라 수도원에 들어갔다고 하고요.
참된 겸양은 무엇일까요? 겸양이란 이름을 지닌 4가지 미덕과 이를 방해하는 습관에 관하여 이야기할까 해요. 첫 번째는 적절한 외적 태도입니다.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습관은 문란함과 경박함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물론 언제나 어디서나 조용히 정숙하게 머물라는 것은 아니에요. 때와 장소 그리고 만나는 사람에 따라 다른데요. 예를 들어 여러분이 좋아하는 노래방을 갔는데 조용히 앉아 양보만 하고 있다면 적절한 태도는 아니겠죠.
마찬가지로 진지하게 영적 대화를 나누거나 중요한 회의를 하는 상황에서 사적인 농담으로 분위기를 흐트러트려도 안 되겠지요. 존경을 받는 어떤 사람이 공적인 자리에서 삐딱하게 앉아 인상을 쓰고 있다면 불손하게 보이고 더는 존경하기가 어려워질 수도 있어요. 물론 죄도 아닌데 가혹할 수는 있지만 적절하지 않은 아주 작은 외적 태도가 많은 것을 잃게 해요.
나이와 직업과 역할에 따라 또 다르지요. 어떤 사람에게는 양보하고 너그러운 겸양의 태도였지만 또 어떤 이에게는 불손할 수 있어요.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똑같이 엄숙하고 단정하고 거룩한 행동을 할 수는 없겠지요. 아이에게 보여주는 겸양과 친구에게 혹은 노인에게 대하는 겸양의 태도는 다를 수 있잖아요.
두 번째는 우리의 이성과 의지라는 내적 태도입니다. 여기에도 주의해야 할 습관이 있어요. 무모할 정도로 과다한 지적 호기심과 이로 인한 부주의함입니다. 어느 한 곳에 집중하지 못하고 이 일에서 저 일로 옮겨가는 태도를 말해요. 그러다 보니 불안정한 상태에서 불안한 감정이 증폭돼요. 결국은 멈춰서 해야 할 독서나 기도하는 일이 점점 어려워질 거고요. 게다가 진짜 해야 할 일을 못 하고 무기력증에 빠져 어리석은 상황에 빠지게 돼요.
세 번째는 대화입니다. 우리가 일상 안에서 이웃과 소통하면서 겸양의 덕이 드러나지요. 주의해야 할 습관은 지나친 수줍음과 과한 잡담입니다. 가끔 우리는 조용한 사람을 겸손한 사람으로 판단할 때가 있는데요. 이 또한 상황에 따라 다르다고 말하고 싶어요. 대화란 서로 주고받아야 하는데 유독 한 사람이 수줍어서 입을 다물고 있으면 신경이 쓰이죠. 물론 지나치게 말을 많이 하는 것도 다른 사람에게 말할 기회를 빼앗는 것이니 주의해야겠지요.
마지막으로 겸양은 외적 단정함과 청결함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불결한 느낌을 주거나 과하게 허세를 보이는 의복도 피했으면 해요. 아주 사소한 것 같지만, 이 또한 상대방을 존중하는 겸허한 태도라고 생각해요.
요즘같이 자유로운 세상에서의 겸양은 참 불편하지요? 그렇기에 좋아하지 않을 수 있는 덕행이라고 생각해요. 우리 자신을 구속한다고 느껴지기도 하고요. 그것도 잠깐이 아닌 늘 혼자 있을 때나 여럿이 있을 때나 한결같이 구속하니까요. 물론 잠자리에 들 때도 그러합니다. 어떤 위대한 성인은 말해요. 우리의 주님은 늘 우리 앞에 계시고 자는 동안에도 우리를 바라보고 계시기 때문에 경건하게 잠자리에 들어야 한다고요.
물론 겸양의 덕을 잘 살아내지 못한다 해서 죄가 되는 것은 아니에요. 다만 우리는 하느님의 은혜로 용기를 내어 완덕에 이르기를 바랄 뿐입니다.
예수님으로 사세요! Live Jesus!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씀
김용은(제오르지오, 살레시오 수녀회) 수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