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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쉬운 믿을교리 해설 - 아는 만큼 보인다]199. 셋째 계명③(「가톨릭교회 교리서」 2184~2195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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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을 지켜야 함은 분명 아주 중요한 계명입니다. “이 의무를 고의적으로 지키지 않는 사람은 중죄를 짓는 것입니다.”(2181) 왜냐하면 주일은 “일의 속박과 돈에 대한 숭배에 대항하는 날”(2172)이고, “인간이 하느님 안에서 누릴 영원한 안식”(2175)을 미리 맛보는 날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주일은 반드시 “기뻐하고 즐거워야 합니다.”(2178)

부모를 만나는 일이 기쁘지 않고 즐겁지 않다면 그것 자체가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음을 말해줍니다. 우리는 주일에 특별히 ‘말씀’과 ‘성체’로 주님을 만납니다. 따라서 “집에서 기도하는 것”과 “교회에서 기도하는 것”(2179)의 기쁨은 비교될 수 없습니다.

성체는 이 세상 어떤 것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불안을 멈추게 합니다. 부모가 주는 따듯한 밥상으로 아이가 마음의 평화도 갖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창조하셨고 나를 책임지시기 위해 피 흘리며 내어주시는 생명의 양식이 성체입니다. 성체성사로 오는 이 평화가 곧 안식인데, 이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식일의 주인”(마르 2,28)이 되십니다.

하지만 주일미사가 ‘의무’로 느껴지면 어떨까요? 아이가 부모를 만날 때 기쁨과 행복이 아니라 오히려 의무감이 느껴지면 어떨까요? 마음의 불안을 해결할 곳이 없고, 심지어 형제를 만나는 일도 기쁘지 않을 것입니다. 누구도 이러한 미사로 다른 이를 초대하고 싶지 않습니다. 누구나 자신이 행복이라고 믿는 곳으로 다른 이들을 초대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아이러니하게도 성체에서 오는 행복에만 집중하지 말아야 할 필요도 있습니다. 부모를 만날 때 부모가 차려주는 음식의 ‘맛’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때부터 미사성제의 빵 나눔만 있었던 것이 아닌 또 다른 아가페, 곧 형제간 친교의 먹고 마심도 마치 전례처럼 이어졌습니다.(사도 2,46)

제가 신학교 들어가기 전에 청년 레지오 활동을 했습니다. 묵주기도나 활동 보고의 의무보다는 남녀가 함께 기도하고 친교를 나누는 일이 더 즐거웠습니다. 나날이 인원이 늘어나 분단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분단 기준이 남·여 성별이 되었고, 이윽고 청년 레지오 팀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친교에서 오는 외적 행복을 무시한 결과입니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도 고소한 빵과 기분을 좋게 하는 술 안에 넣어져 우리에게로 온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친교와 나눔으로, 그리고 결국엔 하느님과의 만남으로 참 행복을 느낄 수 있다면 비로소 이웃을 미사에 초대할 수 있게 됩니다. 주일은 그리스도인들이 “같은 필요와 권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가난과 고생 때문에 쉴 수 없는 형제들을 기억”(2186)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이웃을 나의 안식으로 초대하는 날인 것입니다. 그런데 주일이 하느님과 형제 안에서 기쁘지 않으면 어떻겠습니까? 선교의 에너지는 바로 주일을 기쁘게 지내는 일에서 비롯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을 보면 세상 사람들이 우리가 당신 제자임을 알게 되리라고 하십니다.(요한 13,35) 그리스도인은 특별히 주일에 “기도하고 존경하며 기뻐하는 모범을 모든 사람에게 드러내 보여야”(2188) 합니다. 주일을 지킴은 성체와 친교 안에서 기쁘게 지냄인데, 이것 자체가 선교의 이유요 에너지요 선교 자체가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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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2-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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