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예전에 시골에 살 때 진돗개 한 마리를 선물 받았던 적이 있습니다. 2개월이 조금 넘은 강아지였는데요. 겨울이라 밖에 두지 못하고 집 안에서 키웠습니다. 잘 몰랐는데 손 갈 일이 많았습니다. 강아지가 소변을 가리지 못해 여기저기 오줌과 똥을 싸 놓았고, 털 날리고, 물어뜯고, 책 읽으려고 방에 들어가서 문 닫아 놓고 있으면 놀아 달라고 방문을 긁고, 밤에 잘 때 낯선 장소라 그런지 수시로 울었습니다. 한동안 고생을 좀 했는데요.
얼마 뒤에 돼지도 키우게 돼서, 돼지우리를 만들었습니다. 돼지들을 풀어 놓으니까 우리에서 잘 뛰어놀았습니다. 그걸 보고 문득 ‘여기에 강아지를 풀어 놔도 서로 잘 지낼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강아지를 돼지우리로 가져와 봤습니다. 우리 안에 풀어 놨는데요. 처음에는 낯선 동물에게 기가 죽었는지 살살 피해 다녔습니다. 그리고 사료를 주기 위해서 저녁에 다시 가 봤는데요. 잘 지내는 것 같았습니다. 돼지들이랑 놀다가 돼지 무리 옆에서 같이 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강아지에게 생긴 변화가 한 가지 있었습니다. 보통 집에서 키울 때는 제가 어디를 갈 때 문 앞에서 낑낑대면서 따라가려고 난리를 칩니다. 제가 문 닫고 책 읽을 때도 마찬가지로 상당히 낑낑대는데요. 우리에 가져다 놓은 뒤로는 그게 없어졌습니다. 돼지들과 어울려 노는 게 재미있는지, 아니면 그 안에 강아지가 놀 만한 것들이 상당히 있어서인지 저에게 별 관심이 없습니다. 처음 들어갔을 때 한번 달려왔다가 다시 돼지에게로 가거나 자기 할 일을 합니다. 약간 서운한 마음이 들면서, ‘놀 게 많아졌다고 주인을 찾지 않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는데요.
어떤 때 보면 우리에게도 그런 모습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놀아야 할 거, 먹어야 할 거, 해야 할 일들, 만나야 할 사람으로 분주해져서, 어느 순간부터 주인을 찾지 않고 주인을 향한 기도가 없어졌는지도 모릅니다. 다음의 말씀과 비슷할지도 모릅니다.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스러질 몸을 제 힘인 양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그의 마음이 주님에게서 떠나 있다.”(예레 17,5)
떠나 버린 그 마음을 다시 주님께 돌리기 위해 필요한 것이 혼자만의 시간입니다. 조용히 혼자 침묵할 수 있는 시간, 기도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야 다시 주님께 얼굴을 돌릴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사막 교부들의 금언집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흔히들 사막을 끝없이 이어지는 수평의 연속으로 생각하지만, 그곳에는 수직으로 상승하는 것들이 있다.”
혼자 조용히 머무는 그 시간이 나를 수직으로, 곧 주님께 들어 올려 준다는 겁니다. 그 일이 조금씩 다음의 말씀을 이해하게 해 주리라 생각합니다.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 그는 물가에 심긴 나무와 같아, 제 뿌리를 시냇가에 뻗어 무더위가 닥쳐와도 두려움 없이 그 잎이 푸르고, 가문 해에도 걱정 없이 줄곧 열매를 맺는다.”(예레 17,7~8)
우리가 고요한 시간을 마련해 기도하는 것은 ‘내 힘으로 안 됩니다. 주님이 도와 주시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는 것을 깨닫고 도움을 청하는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그렇게 기도할 수 있는 시간과 장소를 마련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내 시선이 나와 세상이 아니라 주님께 향할 수 있을 겁니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실 겁니다
그 말씀을 읽으면서 하느님의 현존을 느꼈던 짧은 일들이 생각이 났습니다. 주관적이지만 다음의 체험들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시골 본당에 있을 때 일입니다. 옆 본당 신부님과 이냐시오 영신수련 이론 과정을 공부하기 위해서 부천으로 매일 왔다 갔다 할 때인데요. 하루는 점심을 먹으러 가다가 “수녀님이 주신 참고서적을 먼저 제본 집에 맡기자”라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무작정 대학가 근처로 향하긴 했는데, 제본 집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려고 했는데, 데이터 사용량을 초과해서 연결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잠시 차가 정차하는 동안, 정말 아주 잠깐 와이파이가 연결되는 겁니다. ‘어~’ 하면서 빨리 찾아보고 검색이 되자마자 신호가 떨어져 출발하게 됐는데요. 꼭 필요한 만큼 딱 와이파이가 연결된 그 순간 저 개인적으로는 ‘하느님께서 가까이 계시는구나. 도움을 주시는 것 같다’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두 번째는 동기 모임 때 있었던 일인데요. 이 이야기를 하면 아마 동기 신부는 싫어할지도 모르겠지만 신기한 일(?)이 있었습니다. 동기들이 군종신부가 있는 곳에 가서 반 모임을 한 적이 있었는데, 외국에서 사목하는 친구도 함께 있었습니다. 그런데 외국에서 살아가는 것이 쉽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힘들어 보일 때가 종종 있었는데요. 그날 한 친구가 텔레비전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우연히 가톨릭평화방송에서 멈췄습니다. 다른 때면 그냥 넘길 수도 있는데, 교구 주교님이 나와서 잠깐 멈추더군요.
주교님이 선교하시는 분들을 대상으로 강의하고 계셨는데요. 마침 그 순간에 대략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선교사들이 타지에서 힘들고 외롭고 지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예수님의 현존에서 위로를 느껴야 합니다. 어디서 그 현존하심을 체험할 수 있습니까? 미사 안에서 성체의 모습으로 다가오시는 그분을 가까이서 만나고 체험할 수 있습니다.” 왠지 그 이야기가 외국에서 사목하고 있는 동기 신부에게 누군가가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처럼 느껴져서 신기했던 적이 있습니다.
세 번째는 세례받은 지 얼마 안 됐지만 레지오 마리애 활동도 열심히 하고 봉사활동도 열심히 하는 분에게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지나가는 얘기로 짧게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평소에는 외부에 나갔다가 들어오는 길이 엄청나게 막히고 신호도 잘 걸리는데, 레지오 하는 날은 신기하게 길이 뻥 뚫리고 신호도 하나 안 막히고 다 열려.” 그러면서 신기해하고 좋아하는 형제님의 모습을 보면서도, 주님께서 함께하시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일상생활 안에서 함께하시는 주님의 현존을 작은 표징들 안에서 찾고 만나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그 일들이, 빈 무덤의 작은 표징을 보고 주님 부활의 현존을 깨달았던 요한 사도의 고백을 나의 고백이 되게 해 주리라 생각합니다.
김기현 요한 세례자 신부
인천가톨릭대학교 영성지도 담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