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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빛을②] 서울 성베네딕도수도원① 성베네딕도회 한국파견비화ㆍ파견직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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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성 베네딕도회는 `서울 성 베네딕도 수도원`에서 비롯된다. 1909년 서울에 뿌리를 내린 성 베네딕도회는 한국 파견 `첫 남자수도회`였다. 이번호부터는 일곱 차례에 걸쳐 1927년까지 그 맥이 이어질 서울 수도원 역사와 발자취, 교육, 영성 등을 살핀다.
   

 
▲ 서울 동소문에서 바라본 서울 성 베네딕도 수도원 전경. 1910년 7월 말, 수도원 본관 정초식을 마친 이 건물은 벽돌식 2층 건물로 건물 길이가 40m나 됐고 기와를 얹었다.
 1911년 증축공사가 시작돼 그해 9월 14일 공사를 완료, 3층 규모 새 건물로 이사했다.
사진 왼쪽 동소문을 비껴서 증축공사를 마친 자치 수도원 본관과 건물이 보이고, 성곽과 이어진 언덕에 한국 아이들이 앉아있는 풍경이 사뭇 서정적이다.
 

 
▲ 한국 성베네딕도회의 모원인 독일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을 소개하는 e-book에 나온 수도원 전경.
소를 방목하는 농장의 목가적 정경이 특히 눈에 띄는 오틸리엔 수도원은 `기도하고 일하라(Ora et Labora)`라는 모토에 따라 경제적 사고를 일깨우는 노동교육에 있어 농업의 절대적 역할을 지적했고, 선교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오른쪽 상단부 문장이 성 베네딕도회 오틸리엔연합회의 상징 문양이다.
 

 
▲ 성 베네딕도회 한국 파견에 결정적 역할을 한 성 베네딕도회 오틸리엔연합회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
 

 
▲ 1909년 12월 28일 서울에 도착한 1차 파견 선교사들. 수도원 부지를 확보한 뒤 모원 경리책임자였던 도미니쿠스 엔쇼프 신부는 1909년 8월 독일로 돌아갔고 1차 파견 선교사 6명이 4개월 뒤 서울에 들어왔다.
이 때 파견된 선교사들은 카시안 니바우어ㆍ안드레아스 에카르트 신부와 파스칼 판가우어ㆍ일데폰스 플뢰칭거ㆍ마르틴 후버ㆍ콜룸반 바우어 수사였다.
이들이 조선으로 오는 동안 1909년 12월 6일 임시수도원 건물이 지어졌고, 12월 13일에 교황청에서 정식 수도원 인가가 났다.
이듬해 1월 서울 수도원은 원장좌 자치수도원이 됐고, 보니파시오 사우어(앞줄 가운데) 신부가 장상에 임명됐다.
서울 수도원 공동체가 남긴 첫 공동체 사진이다.
마르틴 후버 수사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미뤄 그가 선종한 1910년 1월 26일 이후에 촬영한 사진으로 추정된다.
 

 1908년 9월 15일 어스름한 저녁. 조선대목구장 뮈텔(1854~1933) 주교가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에 도착한다. `안으로는 수도자, 밖으로는 선교사`를 사는 선교 베네딕도회(Missionsbenediktiner)였다.

 1905년 당시 한국천주교회가 운영한 교육기관은 60여 개교로, 모두 초등교육에 그쳤다. 뮈텔 주교는 고등교육기관 설립을 내다보면서 우선 교사 양성을 목적으로 사범학교를 설립하고자 교육사업을 펼칠 수도회를 찾아 유럽을 두루 다녔다. 이런 노력도 헛되이 마리아회와 살레시오회, 베네딕도회, 그리스도 교육회, 빈첸시오회 등 수도회들 답변은 한결같이 `부정적`이었다. 그래서 그해 8월 말 귀국 일정을 늦춰



가톨릭평화신문  2009-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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