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서재에는 총 다섯 권으로 이루어진 운보 김기창 전작 도록이 있다. 내가 귀하게 여기는 책이다. 김기창(金基昶, 베드로, 1913~2001)의 팔순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전집이라 규모가 굉장하다. 운보의 모든 작품이 들어있다. 그림뿐만 아니라 자신이 쓴 수필을 비롯해 신문잡지에 난 기사와 평론까지 들어있다. 그 커다란 책을 펼치면 나의 귀에는 음악이 흐른다.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의 주제곡이다. 존 베리가 작곡한 아름다운 곡이다. 이어서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협주곡도 흐른다. 기차는 아프리카 대륙을 가로질러 달린다. 전작 도록은 운보의 파란만장한 삶을 담고 달리는 기차와 같아 영화 장면과 오버랩된다.
나는 김기창이 청주에 ‘운보의 집’을 열었을 때 가보았다. 운보는 예전에 프랑스 지베르니 마을에 있는 ‘모네의 집’을 갔었다. 그 집을 보고 한없이 부러워했다. 자신도 외가가 있는 청주에 집을 짓고 평생 그림을 그리며 살고 싶다며 지은 집이었다. 한국 전통 가옥에서 한복을 차려입고 손님을 맞이하던 운보의 모습이 생각난다. 동네의 어진 할아버지 같았다. 그때 방문 기념으로 운보의 그림이 담긴 접시를 한 개 받았다. 여름철 원두막 풍경이 정겹게 그려져 있는 접시로 아직도 고이 간직하고 있다.
청력을 잃은 아이
운보 김기창은 서울 종로구 운니동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을 북촌 일대에서 보냈다. 와룡동에는 글방이 있었고, 스승 이당 김은호의 집도 있었다. 돈화문과 휘문중고교, 효자동과 북악산, 세검정 그리고 돈화문 쪽으로 뻗은 길에 단성사가 있었다. 단성사에서는 저녁마다 손님을 부르기 위해 날라리 소리를 내며 북을 쳤다. 저녁 하늘에 울려 퍼지던 그 처량한 소리는 운보가 귀먹기 전에 마지막으로 들은 소리였다.
운보는 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입학식을 치른 얼마 후 운동회가 있었는데 그때 몹쓸 병이 찾아왔다. 장티푸스에 걸린 것이었다. 몇 달을 치료해 다소 병이 회복되었다. 그런데 외할머니가 보약으로 인삼을 달여 먹였다. 그것이 고열로 이어져 청신경이 다 타버렸다. 그 무렵 집안 사정도 급속히 나빠졌다. 외할머니의 재산은 손자의 치료비와 집안의 금광 사업 실패, 자식의 극심한 낭비로 모두 탕진됐다. 어머니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직업을 가졌다. 개성에 있는 여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서울 세브란스 병원 치과 간호사로도 일했다.
운보는 학교에서 수업할 때 선생님 말소리를 전혀 들을 수 없었다. 그래서 혼자 책에 있는 그림을 공책에 그리곤 했다. 어머니는 이런 아들에게 특별한 방법으로 글을 가르쳤다. 종이에 날아가는 새 한 마리를 그리고 그 위에 한글로 ‘새’라고 쓴 후, 다시 커다란 한문 글씨로 ‘鳥’를 썼다. 운보는 대번에 ‘鳥’자 위에 쓴 ‘새’가 날아다니는 새를 뜻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무서운 반복과 피눈물 나는 노력으로 마침내 글을 읽게 되었다. 어머니의 기쁨은 말할 수 없었다.
어머니는 책을 많이 사다 주었다. 운보는 독서에 취미가 생기며 글을 쓰기 시작했다. ‘어린이’ 잡지에 동시 ‘매암이와 쓰르람이의 노래’를 투고했다. 동시는 순수하고 재밌고, 스토리가 살아있었다. 심사위원들은 운보의 작품을 당선작으로 뽑았다. 이를 계기로 운보는 책방을 찾았다. 그곳에는 수많은 책이 있었다. 운보의 책상에는 교과서보다 문학책이 점점 더 높이 쌓여갔다. 세계 문학 작품을 밤새워가며 탐독했다. 운보는 한때 소설가가 되려 했다. 콩트 ‘광녀와 늙은 머슴’도 지었다.문학적 실력이 인정받아 신문사와 잡지사에서는 운보에게 미술평론과 수필을 청탁했다. 운보가 지은 책은 여러 권이다. 대표적인 책이 「서방여적(書房餘滴)」, 「나의 사랑과 예술」, 「침묵과 함께 예술과 함께」, 「세계화필기행화문집」, 「침묵의 심연에서」이다. 운보는 화가, 시인, 수필가, 소설가, 미술평론가로 멀티 아티스트였다.
천재적 화가의 탄생
어머니는 아들을 화가로 키울 생각을 가졌다. 그러나 아버지의 생각은 달랐다. 장애아들이 평생을 살아가려면 기술이 필요하므로 목공 기술을 가르쳐 목공 기술자가 되길 원했다. 어머니는 극구 반대했다. 결국, 어머니의 뜻대로 운보는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미술 공부를 하게 되었다. 어머니는 아들을 데리고 당대 최고의 화가인 이당 김은호를 찾아갔다. 그리하여 운보는 이당에게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다. 몇 개월이 흘렀다. 이당은 운보에게 큰 그림을 그려보라고 했다. 조선미술전람회(鮮展) 출품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다.
운보가 어느 날, 안국동 뒷골목을 지나가고 있었다. 길을 걷는데 기와집 담 너머로 처녀가 치솟았다. 운보는 그 집의 안을 들여다보았다. 처녀들이 널을 뛰고 있었다. 이에 영감을 얻어 널뛰기 그림을 그렸다. 그림이 완성되자 이당에게 보여주었다. 이당은 대단히 흡족해했다. 이 그림은 ‘판상도무(板上跳舞)’란 제목으로 선전에 출품됐다. 그런데 놀랍게도 초입선했다. 그 소식을 들은 어머니는 무척이나 기뻐했다. 그 그림은 세브란스병원 치과 과장 부스 박사가 큰돈을 주고 사서 병원에 걸어두었다. 그런데 그만 6ㆍ25 전쟁 때 분실되고 말았다.
그 후에 운보는 ‘고담(古談)’이란 작품을 그려 선전에서 특선해,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받았다. ‘고담’은 할머니가 어린아이들을 앞에 놓고 이야기를 들려주는 그림이다. 계속해서 선전에 출품해 특선을 네 번이나 연이어 받아 추천작가가 되었다. 언젠가 어머니 친구인 나혜석이 운보의 그림을 보고 “기창군의 그림은 돌아가신 어머니의 넋이 보이는 것 같다”고 했다. 나혜석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였다. 어머니는 아들이 선전에 두 번 입선하는 것을 보고 세상을 떠났다. 허약한 몸으로 출산한 후에 갖가지 병이 한꺼번에 겹치면서 서른여덟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것이다.
운보는 자신의 생애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여성으로 외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부인 우향 박래현을 꼽았다. 어머니는 운보가 선전에 처음으로 출품하기 전에 ‘雲圃(운포)’라는 두 글자를 써주며 호로 사용하라고 했다. 운보는 그 호를 쓴 작품으로 입선했다. 그 후로 한동안 그 호를 썼으나 ‘雲圃’는 획이 많고 답답해 보였다. 해방 직후에 해방된 기쁨을 나름대로 나타내기 위해 ‘圃’의 울타리를 벗겨내고 ‘甫’로 고쳐 ‘雲甫(운보)’로 쓰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운보는 극심한 충격과 걱정에 사로잡혔다. 생활이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식구들은 아침저녁을 멀건 죽으로 때웠고, 점심은 굶었다. 굶주림이 계속되자 식구들은 영양실조로 얼굴이 누렇게 부었다. 생활고를 해결해야만 했다. 스승인 이당이 이를 알고 소품을 열 장만 빨리 그려오라고 했다. 그날 밤 등잔불을 켜놓고 물로 굶주림을 달래가며 밤을 꼬박 새워 열 점을 그렸다. 이당은 그 그림들을 화실 벽에 붙여 놓고는 친구들을 불러 팔아주었다. 또한, 어머니가 일했던 세브란스병원 치과 부스 박사 내외가 서양인들에게 운보의 그림을 팔아주었다. 그 방식도 멋있었다. 강원도 원산 명사십리에는 서양인들이 많이 찾는 별장이 있었다. 해당화가 만발한 여름에 서양인들은 그곳을 많이 찾았다. 바로 그곳에서 소품전을 열어준 것이다. 작품은 많이 팔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