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보는 사랑하는 아내를 잃었다. 운보의 눈과 귀가 되어 인생길을 함께 걸은 동반자였다. 아내를 잃고는 무척 괴로워했다. 우향을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어느 가을날 오후였다. 운보가 늦은 시간에 집에 들어섰다. 그러자 젊은 여인과 마주쳤다. 운보는 그 여인의 멋과 아름다움에 놀랐다. 우향 역시 놀랐다. 우향은 운보를 처음 본 순간을 이렇게 기억했다. “내 앞에는 거대한 검은 바윗덩어리 마냥 시커먼 체구가 버티고 있어 그것에 부딪쳤다. 엉겁결에 뒤로 물러서면서 그 시커먼 바윗덩어리를 바라보는 순간, 나는 또 놀라고 말았다.”
또 놀란 이유는 운보를 칠십 대 노대가로 알고 인사하러 왔는데, 젊고 패기가 가득한 미남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날을 계기로 둘은 급속히 가까워졌다. 서로에 대한 감정이 존경과 이해와 사랑으로 뒤범벅되었다. 운보는 귀먹고 가난하고 학벌도 없는 자신을 지주의 맏딸로 최고학부를 나온 여성과 비교해보니 결혼을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당치도 않았다. 그러나 우향은 용기 있게 그리고 현명하게 운보를 택했다. 운보는 그러한 우향에게 평생 고마워했다. 불우한 자신을 구원해주었고,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았기 때문이었다.
우향은 전혀 말을 하지 못하는 운보에게 말을 가르쳤다. 혹독할 정도로 발성 연습을 시켰다. 1년 동안 노력한 끝에 어느 정도 말로 대화할 수 있게 되었다. 어머니는 글을 가르쳤는데 아내는 말을 가르친 것이다. 우향이 미국에 딸과 함께 있었을 때, 운보는 딸로부터 급히 미국으로 오라는 전보를 받았다. 서둘러 미국에 도착한 운보에게 딸이 말했다. “아빠, 엄마 모습 보시고 놀라지 마세요.” 운보는 아내의 모습이 얼마나 변했으면 딸이 저런 소리까지 하나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병실로 들어갔다. 침대에 누워있는 환자는 우향이 아니었다. 뼈만 앙상한 웬 낯선 노파가 누워있던 것이었다. “아! 아! 이게 웬일이오.” 아내를 한국으로 데려와 병원에 입원시켰고, 극진히 보살폈다. 그러나 갖가지 병이 한꺼번에 겹치면서 아내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예수의 생애가 화폭 속으로
피난 생활 할 때였다. 운보는 극심한 생활고에 쪼들렸다. 당시 미군 부대에서 초상화를 그리던 어떤 화가가 함께 초상화를 그리자고 해 운보도 초상화를 그리며 생계를 유지했다. 그러던 중에 아내와 친분이 있던 사람의 도움으로 작은 전시회를 열 수 있었다. 그림을 판 돈으로 아내의 옛집이 있는 군산 구암동에 작은 집을 마련했다. 신이 난 운보는 그곳에서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종교적으로 미술사적으로 놀라운 작품이 만들어졌다. 꼬박 1년 동안 ‘예수의 일대기’ 서른 점을 제작한 것이다. ‘예수의 일대기’는 조선 풍속에 따라 그렸다. 예수님도 갓 쓴 조선 양반으로 그렸고, 성모님도 저고리와 치마를 입은 조선 여인으로 그렸다.
운보는 성화를 그릴 때 이상한 꿈을 꾸었다. 어두운 동굴 속으로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운보는 그 빛 아래에서 예수님의 시신을 부둥켜안고 통곡하였다. 통곡을 끝내고 정신을 차려보니 그곳은 어두운 동굴이 아닌 찬란한 햇빛이 들어오는 자기 방이었다. 운보는 ‘예수의 일대기’를 그리다가 깜빡 졸았고 그때 예수님 꿈을 꾼 것이었다. 운보는 네 복음서를 펼쳐놓고 고심하면서 ‘예수의 일대기’ 밑그림을 그렸다. 그런데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려고 하니 화구, 붓, 물감이 없었다. 마침 아는 사람이 이러한 사정을 알고는 일본에서 미술 재료 일체를 구해주었다. ‘예수의 일대기’는 주제별로 그렸다. 수태고지부터 탄생, 복음 선포, 십자가 죽음 그리고 부활에 이르기까지 전 생애를 서른 점으로 완성한 것이다.
특히 ‘수태고지’, ‘아기 예수 이집트로 피난’, ‘물 위를 걷다’ 등의 몇 작품은 미술평론가들이 극찬했다. ‘수태고지’는 보티첼리와 다빈치, 라파엘로 등의 서양화가들이 한 번씩은 그렸다. 운보는 그들이 그린 근엄하고 놀란 표정의 성모님과는 달리 말씀에 그대로 순종하는 모습으로 그렸다. ‘아기 예수 이집트로 피난’은 이집트로 급히 떠나는 성가족의 쓸쓸한 모습을 삭막한 풍경을 배경으로 그렸다. 나귀에 성모님과 아기 예수님을 태우고 뒤돌아보는 요셉의 표정을 불안하게 그렸다.
‘물 위를 걷다’는 단원 김홍도의 신선도처럼 그렸다. 집어삼킬 듯한 파도, 물에 잠긴 배와 제자들의 불안한 모습,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베드로,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두 손으로 건져주는 모습은 운보가 조선 회화의 전통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예수의 일대기’는 서울에서 전시되었다. 전시장은 성황을 이루었다. 멀리 경상도와 전라도에서 갓 쓰고 두루마기를 입은 어르신들도 올라와 구경했다. 그들은 “예수님이 우리나라에 재림하셨다”고 기뻐했다.
운보는 ‘성당과 수녀와 비둘기’라는 작품도 그렸다. 아담한 성당이 있고, 검은 옷을 입은 수녀가 흰 비둘기를 가슴에 안고는 종탑을 올려다본다. 성당의 종소리가 울려 퍼진다. 이 그림은 운보의 막내딸과 관련이 있다. 아내가 막내딸을 임신했을 때, 운보가 꿈을 꾸었는데 막내딸이 수녀가 되는 꿈이었다. 꿈에서 보았던 그 수녀의 모습을 그대로 그린 것이 이 작품이다. 막내딸 김영(아나윔) 수녀는 그림의 수녀가 자신과 꼭 닮았다고 했다. 김 수녀는 인도의 데레사 수녀가 설립한 ‘사랑의 선교 수녀회’에 입회했고, 종신서원을 하여 수녀가 되었다. 이 작품은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기증해 현재 바티칸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운보는 일흔 살이 되던 해에 성라자로마을 성당에서 이경재 신부의 주선으로 김수환 추기경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 운보는 어렸을 때, 어머니 손을 붙들고 감리교 교회에 다녔다. 그러다가 이당 김은호 화숙에 들어가면서 스승과 함께 장로교 안국교회에 다녔다. 운보가 개신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막내딸이 수녀가 된 것이었다. 막내딸은 수녀가 되기 전에 아버지를 지극정성으로 보살폈다.
별이 된 바보산수의 개척자
운보는 우리나라 위인들의 초상화를 많이 그렸다. 그가 그린 대표적인 초상화는 세종대왕 영정이다. 그 영정은 지금도 1만 원권 지폐에 사용되고 있다. 이외에도 을지문덕, 김정호, 조헌, 신숭겸의 영정을 그렸다. 이들 영정은 국가가 공인한 표준영정이 되었다. 그런데 세종대왕 영정에 대해 시비가 많았다. 대왕의 얼굴이 이상하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운보는 “수백 년 혹은 1000여 년 전의 인물을 실감 나게 화폭에 재현하는 데는 한계가 있기에 화가는 상상력을 발휘해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밖에 없다”고 반박했다. 그리고 청주에 운보 기념관이 건립되었을 때도 사람들은 일제강점기 때 많은 독립투사를 배출한 청주에 친일 행위를 한 사람의 기념관이 들어서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고 하며 반대했다.
운보는 자신의 친일 행위에 대해 “일본 강점기에 활동한 사람으로 그 행위가 일본에 도움을 준 것이라면 달리 변명하지 않겠다”고 하며 “용기 있고 떳떳하게 나아가지 못한 점은 사죄한다”고 했다. 덧붙여서 “사상적인 친일로 무장했다거나 일제의 정책에 적극 가담했다고 말한다면 나는 결코 아니다”라고 했다. 어느 날, ‘운보의 집’에 소장하고 있던 작품 60여 점이 도난을 당했다. 그날 집을 지키던 진돗개는 뒷산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전에는 연못에서 기르던 잉어 100여 마리가 하루아침에 몰살당했다.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저지른 일이었다.
운보는 후소회 창립 기념 전시장에서 갑자기 쓰러졌다. 뇌졸중으로 쓰러진 것이다. 그 후로 오랫동안 투병했다. 어느덧 미수(米壽)를 맞았다. 운보는 불편한 몸을 이끌고 ‘운보 바보예술 88년’ 전시회에 참석했다. 옥색 모시 한복에 흰 고무신 그리고 빨간 양말 차림이었다. 아직도 예술혼이 생생히 살아있음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이 땅에 청록산수와 바보산수라는 독특한 화풍을 개척한 운보 김기창 베드로는 그렇게 투병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삶이나 예술은 육체적 이중고를 초극한 실로 ‘위대한 실존상(實存像)’으로 우리 모두의 삶의 귀감이 될 것이다.”(시인 구상)
“남들이 소음을 들을 제 운보는 신의 음성을 들었다.”(노산 이은상)
참고자료 : ▲김기창. 沈默의 세계에서(오늘의 산문선집15). 민음사. 1976. ▲운보 김기창 전작도록발간위원회. 雲甫 金基昶 (Ⅰ,Ⅱ,Ⅲ,Ⅳ,Ⅴ). 도서출판 API. 1994. ▲오광수. 김기창·박래현(재원미술작가론15). 재원. 2003. ▲가톨릭신문(2001.2.4.) 고 김기창 화백의 예술과 삶. ▲동아일보(2006.1.23.) 2001년 ‘운보 김기창 화백 별세 ’. ▲오마이뉴스(2005.4.19.) ‘친일화가가 그린 만원권 세종대왕 바꿔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