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중(프란치스코, 金世中, 1928~1986)은 공공조각 분야에서도 독보적인 존재였다. 그가 처음 제작한 작품은 전 국민이 모금한 돈으로 건립한 ‘유엔 참전 기념비’였다. 6·25전쟁 때 공산주의를 물리치기 위해 참전한 유엔군을 기념하는 조형물이다. 기념탑은 제2한강교(현 양화대교) 북쪽 끝에 약 55m 높이로 세워졌다. 그런데 이 기념탑은 도로를 확장하느라 안타깝게도 철거되었다. 기념비의 전면과 후면에는 ‘자유의 여신상’과 ‘승리의 남신상’이 조각되어 있고, 기념비 아래에는 ‘광복’, ‘건국’, ‘전쟁’, ‘유엔의 도움과 재건’이라는 4개의 청동 부조를 새겼다. 김세중은 이 건축물에 종교적 상징을 넣었다. 죽은 아들을 품에 안고 슬퍼하는 어머니의 조각은 피에타를 연상시키고, 칼을 두 손으로 잡고 서 있는 천사 조각은 가톨릭 천사의 모습이고, 두 사람이 함께 서 있는 조각은 1955년에 제작한 ‘자매 순교자’ 모습이다.
김세중의 가장 유명한 공공조각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상’이다.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와 서울신문사가 공동으로 건립을 추진했다. 대통령 박정희는 이순신 장군을 존경했다. 그래서 동상은 박정희가 헌납하고 제자(題字)도 박정희가 썼다. 명문(銘文)은 시인 이은상이 지었고, 조상(彫像)은 김세중이 하였다. 미술전문가들은 이순신 장군상은 서양의 장군상과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고 했다. 서양의 장군상은 대부분 말을 타고 있는데, 이순신 장군상은 우뚝 선 입상이다. 한국 전통 조각의 맥을 그대로 이은 것이다.
그런데 한편에서 이순신 장군상에 이의를 제기했다. 동상은 군사독재자의 발상과 발주로 만들어졌고, 칼을 오른손에 잡고 있어 패장(敗將)의 모습이며, 세종로는 충무공과 전혀 관계가 없는 곳이며, 장군의 모습은 현충사 표준 영정과 다르므로 동상을 철거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에 대해 김세중은 자신의 생각을 분명히 밝혔다.
“예술은 하나의 거목에서 무한한 내면성을 찾으며, 그 시대의 이념과 요청을 여기에 반영시켜 끊임없는 새 양심과 인격 그리고 정신을 뽑아내는 것이 아니겠는가. … 작품의 생명은 형태의 정도보다 거기서 풍기는 강한 사상성에 있다. 이런 점에서 역사를 후대에 미화 내지 이상화시켜 전승시켜야 한다는, 국민 교육적 작가의 희망에서 동상을 제작한 것이다. 사진과 똑같은 영정을 만드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어쨌든 이순신 장군상은 오늘날 우리나라의 상징적 이미지가 되었고 대한민국의 랜드마크로 자리매김했다. 이외에도 김세중은 수많은 공공조각을 제작했다. 파고다(탑골) 공원의 ‘3·1 운동 기념 부조’, 국립극장의 ‘분수대’ 조각, 장충단 공원의 ‘유관순 동상’, 서울의 ‘남산 터널 부조’, 여주 영릉의 ‘세종대왕상’, 어린이대공원의 ‘분수’ 조각, 임진각의 ‘아웅산 순국 위령탑’, 국회의사당의 ‘애국애족의 군상’, 부여의 ‘계백장군 기마상’, 행주산성의 ‘권율 장군상’ 등이다.
하느님의 얼굴을 작품에 담다
김세중은 모든 예술은 하느님의 모습을 찾는 일이며, 그 일을 끊임없이 추구해 나가는 사람이 바로 예술가라고 했다. 그래서 예술 작품은 ‘하느님의 얼굴’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예술에는 고행이 따르는 법이고, 엄격하고 가혹한 ‘자기 학대에 가까운 고행’ 없이는 예술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김세중은 그러한 고행을 예술로 승화시켰다. 그의 종교 조각에서는 중세 시대의 그 경건함과 엄숙함 그리고 거룩함이 동시에 느껴진다. 어떤 미학자가 말했다. “예술가는 더 이상 불가능한 시도를 하며 끝없이 좌절하는 무모한 사람이 아니다. 김세중은 행복한 시시포스다.” 시시포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코린토스의 왕인데 제우스의 분노로 저승에서 무거운 바위를 산 정상까지 밀고 올라가는 벌을 받았다.
김세중에 대한 일화가 전해진다. 서울대 신입생 환영회가 있는 날이었다. 어떤 공대 학생이 한 미대 학생을 괴롭혔다. 이를 본 다른 미대 학생이 그 공대 학생에게 폭력을 가했다. 순간적인 격정을 이기지 못한 것이었다. 바로 문제 학생이 되었다. 학생의 어머니가 학생과 함께 김세중 미대 학장실로 불려왔다. 김세중은 그윽하면서 엄중한 눈길을 보냈다. 그러면서 “미술대학 역사에 이런 일은 없었네!”하고 딱 한마디만 했다. 그 학생은 김세중 앞에서 고개를 숙였고, 잘못을 뉘우치고는 학장실을 조용히 나갔다.
김세중 교수의 실기수업 시간이었다. 어떤 학생이 투정을 부리듯 작업을 안 하고 고개를 숙이고 무언의 반항을 했다. 그런데 김 교수는 야단을 치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 나가 우유와 빵을 사갖고 왔다. 그러면서 “자네 이거 먹고 힘내서 작업하게”하고 따뜻이 격려해 주었다. 김세중은 실기를 지도할 때 학생들 작품에 일일이 손을 대지 않았다. 그렇지만 작업하는 학생 옆을 지나가기만 하면 학생의 작품은 저절로 완성되었다. 실기를 말보다 표정으로 가르친 것이다. 김세중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학생들을 찾아내 장학금을 주어 학업을 포기하지 않게 했다. 그래서 적지 않은 학생이 계속 공부할 수 있었다.
엄격한 예술가, 자상한 스승
김세중은 위를 수술했다. 생명을 건 대수술이었다. 수술 경과가 좋지 않아 여러 달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그는 입원실에 자신이 만든 ‘예수상’을 세워놓고는 늘 기도했다. 병이 주는 고통과 시련을 극복할 수 있도록 예수님께 간청했다. 김세중이 입원실에 놓고 기도한 ‘예수상’은 약 50㎝ 높이로 청동으로 조각되었다. 조각의 예수님 얼굴은 유난히 긴데 눈을 지그시 감고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듯하다. 얼굴을 극도로 단순화했기에 종교적 신비감이 더욱 강하게 느껴진다. 김세중은 그 ‘예수상’을 통해 위로받고 치유되었다. 이 작품은 현재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김세중은 세상을 떠날 때까지도 공인으로 일했다. 당시 미술인들의 꿈이었던 과천의 국립현대미술관 건립계획이 예산 부족으로 취소될 운명에 처했다. 국립현대미술관(덕수궁 위치) 관장이었던 김세중은 날마다 국회를 찾아다니며 의원들을 설득했다. 그의 끈질긴 설득과 간청 끝에 국립현대미술관을 다시 건립하기로 결정했다. 과천에 새로운 국립현대미술관이 건립되기 시작했고 그 건축의 총지휘를 김세중이 맡았다.
그런데 준공을 두 달 앞두고 과로와 지병으로 김세중은 5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장례 미사는 명동대성당에서 김옥균 주교가 집전했다. 그의 운구는 마지막 마무리로 한창이던 미술관 건립 현장을 돌았다. 공사 현장에서 최후의 작별을 고할 때, 공사장 근로자들은 침통한 표정으로 도열해 운구를 향해 깊이 머리 숙였다. 그들은 똑같은 오리털 점퍼를 입고 있었다. 그것은 김세중이 현장 근로자들이 추운데 일한다고 사비로 사서 나누어준 마지막 선물이었다. 김세중의 제자였던 조각가 최종태(요셉)는 스승을 이렇게 기억했다.
“엄격하신 예술가로서, 자상하신 교육자로서, 탁월하신 행정가로서 매사에 원칙을 바로 세우시고 옳은 일이라 판단되실 때는 물불을 마다치 않으셨으며 각계각층의 수많은 선배 후배들에 대해 고르게 마음 쓰시는 참으로 큰 틀을 타고나신 드문 스승이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