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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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막의 스타 윤정희, 가톨릭 영화에서 빛나다

[백형찬의 가톨릭 예술가 이야기] (29) 윤정희 데레사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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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은총… 한센병 환자 돕는 일 나서

윤정희(데레사, 尹靜姬, 1944~2023)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그녀가 가톨릭 신자가 된 것은 중학생 때였다. 그녀의 집안은 할아버지 때부터 독실한 가톨릭 신자 집안이었다. 그래서 본당에서 레지오 마리애 활동도 열심히 했다. 남편인 피아니스트 백건우(요셉마리)도 신자이며 딸도 세례를 받았다. 윤정희는 자신의 데뷔작 ‘청춘극장’의 ‘1200 대 1’ 오디션을 뚫은 비결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된 것 같다”고 했다.

오디션을 보기 전에 명동대성당 주임 신부를 찾아갔다. 윤정희가 물었다. “영화배우를 해도 될까요?” 신부가 대답했다. “네가 부끄럽지 않은 자랑스러운 배우가 된다면.” 이 말은 윤정희가 은막의 스타가 되는 데에 큰 힘이 되었다. 윤정희는 아무리 바빠도 가톨릭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경기도 안양에 있는 라자로 마을에서 한센병 환자를 돌보고 있는 이경재 신부를 돕기 위해 ‘라자로 돕기회’라는 후원회가 만들어졌다. 후원회를 주도한 가톨릭 신자는 윤정희를 비롯해 김남조(시인), 전봉초(음악가), 신태민(언론인) 등이었다.

이들은 이경재 신부의 뜻을 받들어 병고와 외로움에 힘들어하는 한센병 환자들을 돕는 일에 앞장섰다. 그리고 윤정희는 가톨릭 저널리스트 서울클럽이 주최한 명동성당 문화관 자선쇼에 가톨릭 신자 연예인인 이낙훈, 여운계, 하춘화, 한상일, 양희경, 이상룡 등과 함께 출연했으며 또한 한국가톨릭연예인협회 이사직을 맡아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윤정희는 자신이 가톨릭 신자임을 나타내기 위해 오른손에 늘 세례 반지를 끼고 다녔다.

 
이경재 신부와 윤정희 배우
 
영화 '새남터의 북소리' 중 한 장면


가톨릭 영화

윤정희는 일찍이 가톨릭 영화의 주인공으로 출연했다. 그 첫 번째 영화가 ‘새남터의 북소리’이다. 영화의 시대적 배경은 천주교 박해가 극심했던 조선 말엽이다. 영의정의 서자로 태어난 민서(남궁원)는 소문난 한량이다. 어느 날, 다련(윤정희)이라는 여성을 보고 마음에 깊이 넣어두었다. 민서는 다련이 천주교 신자라는 것을 알게 된다. 다련은 미사를 봉헌하던 중에 포졸들에게 발각되어 포도청으로 끌려간다. 다련은 그곳에서 온갖 고문을 당한다. 민서는 포도청으로 들어가 다련을 구해 도망간다. 그러나 민서와 다련은 체포되고 만다. 그 둘은 새남터로 끌려가 형장에서 순교한다. 영화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은 민서가 포졸들에게 끌려가는 수레 앞에서도 신부에게 세례받는 장면이다. 이 영화의 감독과 배우는 가톨릭 신자였다. 최하원 감독도 신자이고 윤정희, 이낙훈, 김성원도 모두 신자였다.

이 영화에 대한 감동적인 일화가 전해진다. 고문 장면을 촬영하는데 고문은 학춤이므로 배우가 거꾸로 매달려 있어야 했다. 학춤은 죄수의 옷을 벗기고 양팔을 등 뒤로 젖혀 묶은 뒤 공중에 매달아 놓고 때리던 형벌이다. 허공에 매달린 모습이 학이 춤추는 모습과 비슷해 학춤이라 한 것이다. 윤정희는 철봉에 거꾸로 매달려 무려 10분을 있었다. 피가 솟구쳐 숨을 못 쉬겠다고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윤정희는 굳건한 신앙심으로 그 힘든 역할을 기어이 해내고 말았다.

또한 새남터 형장을 촬영할 때 엑스트라가 600명이 필요했다. 당시 그러한 인원을 모은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기적과 같이 대방동과 당산동본당의 신자들이 자진 참여해 촬영을 무사히 끝낼 수 있었다. 김수환 추기경은 어린이회관에서 개막된 시사회에 참석해 연기자와 제작진을 따뜻하게 격려해주었다.

한국가톨릭연예인협회에서 선교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목소리’라는 영화를 만들었다. 6·25 전쟁 당시 명동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원에 인민군이 주둔해 종교적 탄압을 가하는데, 수난받는 성직자와 수도자를 통해 가톨릭 신앙의 본질적 의미를 깨닫게 해주는 영화이다. 윤정희, 박노식, 이낙훈, 여운계, 김성옥 등 가톨릭 신앙을 가진 배우들이 총출연했다. 배우들은 출연료를 받지 않았다. 윤정희는 영화 속에서 동정녀 수임 역할을 맡았다. 물론 감독인 김영걸도 신자였다. 영화 제작 전에 연기자와 제작자가 모두 명동대성당에 모여 함께 미사를 봉헌했다. 당시 영화계의 관행은 돼지머리를 놓고 고사를 지내는 것이었다.



당대 최고의 여배우

윤정희의 본래 이름은 손미자이다. ‘윤정희(尹靜姬)’는 자신이 직접 지은 이름이다. ‘청춘극장’ 오디션을 앞두고 지었다. 배우가 되더라도 고요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에 ‘고요할 정(靜)’에 ‘여자 희(姬)’로 이름을 지었다. 성은 조선의 마지막 황후 윤비를 생각해서 ‘윤(尹)’으로 했다. 윤정희는 경남 부산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와세다 법대를 나온 엘리트로 부산에서 신문기자로 있었다. 그녀는 어린 시절을 부산에서 지냈고 전남 광주에서 청소년기를 보냈다. 문학작품을 무척 좋아해 소설을 밤새워가며 읽었다. 그래서 후에 문학작품이 원작인 영화에 많이 출연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녀는 전남여중과 전남여고를 거쳐 조선대 영문학과에 진학했다. 다시 우석대 사학과로 편입해 졸업했다. 대학 재학 중에 미스 코리아 선발대회에 참가해 미스 전남 미에 당선되기도 했다. 바로 그때 ‘청춘극장’의 여주인공이 되었다. 남자주인공은 당대 최고의 배우인 신성일이었다. 이 영화는 흥행에 크게 성공했다. 그리고 윤정희는 그해 대종상 신인상과 청룡영화제 인기상을 휩쓸었다. 윤정희는 ‘청춘극장’ 단 한 편으로 스타가 되었다. 그리고는 문희, 남정임과 함께 트로이카를 이끌었다.

윤정희는 50여 년 동안 300여 편의 영화에 출연했고, 29회에 걸쳐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또한 한국의 3대 영화제인 청룡상, 대종상, 백상예술대상에서 세 번씩이나 주연상을 받았다. 윤정희가 주연한 영화는 언제나 대성황이었다. 어느 해는 윤정희가 주인공인 영화 다섯 편이 동시에 개봉되기도 했다. 윤정희는 카이로국제영화제에서 리처드 기어와 함께 ‘평생공로상’을 수상했고, 전미비평가협회가 뽑은 ‘세계 여배우 2위’에 선정되기도 했다. 윤정희와 가장 많은 영화를 촬영한 신성일은 윤정희를 이렇게 기억했다. “나와 함께 가장 많은 작품을 한 여배우는 윤정희다. 무려 99편에 함께 나왔다. 엄앵란 다음으로 내 속내를 터놓을 수 있는 여배우다. … 윤정희는 타고난 자연미 덕분에 보는 이를 편안하게 해주는 캐릭터였다. 학구적이면서도 철이 든 배우였다. 촬영장에서도 미심쩍은 부분이 있으면 책을 찾아가면서 확인했다.”

 
윤정희 배우 가족들

공부하는 연기자

나는 어렸을 때 인천의 시민관과 애관극장에서 윤정희가 주연인 영화를 많이 보았다. 포스터와 극장 간판에 그려진 윤정희의 얼굴이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다. 윤정희가 나오는 영화는 무조건 보러 갔다. 기억나는 영화가 있다. 황순원 원작의 ‘독 짓는 늙은이’이다. 배우로 윤정희와 함께 황해, 남궁원, 허장강, 김희라, 김정훈(아역)이 나왔다. 이 영화는 ‘미성년자관람불가’였는데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황해가 독 짓는 늙은이의 역할을 했다. 그 강렬한 표정과 목소리는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윤정희는 그의 젊은 부인이었다.

윤정희는 공부하는 연기자였다. 그녀의 원래 꿈은 교수나 외교관이 되는 것이었다. 미국 유학을 꿈꾸며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하기도 했다. 그녀는 한국 최초로 석사 학위를 취득한 여자 배우였다. 중앙대 대학원에서 ‘영화사적 측면에서 본 한국 여배우의 연기’라는 논문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학위를 받던 날에 황정순을 비롯한 원로 여배우들이 ‘경사’라며 졸업식장을 찾아 축하해주었다. 그 후에 윤정희는 프랑스 파리로 유학 가기로 결심했다. 서강대 프랑스어 교수를 찾아가 어학 교습도 받았다. 영화이론을 전공하기 위해 소르본느 대학(파리 제3대학)을 택했다. 그 대학에서 학사학위와 석사학위 과정을 마쳤다. 석사학위 논문은 ‘영화 속에 비친 한국 여인상에 대한 고찰’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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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3-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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