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정희(데레사, 尹靜姬, 1944~2023)는 리즈 시절에 ‘한국의 오드리 헵번’이라 불렸다. 윤정희는 외국영화에 단 한 번도 출연한 적이 없다. 외국영화사에서 일본인 또는 중국인 역을 맡아달라는 제의가 있었는데 모두 거절했다. 이유는 연기자는 자신이 맡은 역에 철저히 책임을 져야 하는데 문화가 다른 외국인 역을 맡으면 그 역을 철저히 해낼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연기자의 역할에 대해서 고지식했다.
윤정희 부부가 에펠탑 근처 샤요궁 현대미술관에 전시를 보러 갔다가 우연히 프랑스 배우 알렌 퀴니를 만났다. 그는 당시 프랑스의 최고 남자 배우였다. 그 배우는 전혀 모르는 윤정희를 발견하고는 다가와 말을 걸었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길 원해 소르본느 대학 근처 카페로 갔다. 자신이 10년 동안 구상한 영화가 있는데 여주인공 역을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윤정희를 처음 본 순간 동서양의 매력을 동시에 지닌 여성이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물론 그 배우는 윤정희가 한국의 유명한 배우라는 것을 전혀 모르고 한 말이었다. 윤정희는 그 제안에 정중히 거절했다. 그리고 윤정희는 브래드 피트가 주연인 영화 ‘티벳에서의 7년’에 어머니로서 출연을 제의받기도 했다. 윤정희는 영광스럽게도 프랑스 정부로부터 문화예술 공로 훈장인 ‘슈발리에 훈장’을 받았다. 이 훈장은 문학과 예술 분야에서 업적을 남긴 외국인에게 수여하는 상이다.
평생의 반려자 백건우
독일 뮌헨에서 올림픽 문화축전이 열렸다. 윤이상이 작곡한 오페라 ‘심청’이 공연되었다. 그런데 같은 장소인 뮌헨에서 우리나라 영화 ‘孝女 淸이’가 상영되었다. 윤정희는 그 영화에 출연했고, 신상옥은 감독을 맡았다. 두 사람은 주최 측의 초청으로 뮌헨에 왔다. 윤정희는 시간을 내어 윤이상의 오페라를 보러 갔다. 그런데 좌석을 찾기가 어려웠다. 그때 착한 모습의 한국 청년이 친절하게 안내해주었다. 그 청년은 공연이 끝난 후 뒤풀이하는 장소에서 윤정희에게 꽃 한 송이를 건네주었다. 그가 바로 백건우였다. 미국 뉴욕에서 공부하던 백건우는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 공연하러 왔다가 친한 사이였던 윤이상의 오페라 공연을 보려고 뮌헨에 온 것이었다.
그로부터 2년 후에 윤정희는 파리로 유학을 왔다. 어느 날 중국인 친구와 허름한 식당에 식사하러 갔다가 그곳에서 다시 백건우를 우연히 만났다. 백건우는 식사하러 막 들어오고 윤정희는 식사를 끝내고 막 나가려던 참이었다. 그것은 운명이었다. 당시 윤정희는 한국 최고의 영화배우였고, 백건우는 유망한 피아니스트였다. 윤정희는 백건우를 평생의 반려자로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파리에 사는 한 한국인 원로 화가의 집에서 조촐하게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 예복은 한복이었고, 신부 화장은 윤정희가 혼자서 했다. 예물도 실반지 한 쌍이 전부였다. 신혼집은 파리 몽마르트르 언덕의 작은 아파트였다. 결혼한 이듬해에 일명 ‘윤정희-백건우 부부 납북 미수 사건’이 일어났다. 부부는 당시 공산 국가였던 유고슬라비아의 자그레브로 연주하러 갔다. 그곳 공항에서 북한으로 납치될 뻔한 것이다. 간신히 미국 영사관으로 탈출했다. 이 사건은 윤정희 부부가 파리 주재 한국대사관에서 탈출 과정을 밝히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연주 여행은 성지순례
윤정희 부부는 세계 곳곳에서 이어지는 연주회가 끝나면 제일 먼저 성당을 찾았다. 그들 부부에게는 연주 여행이 곧 성지순례였다. 그들은 여행할 때마다 루르드 성지의 ‘기적의 물’과 「묵주의 9일 기도」 책을 갖고 다니며 기도했다. 윤정희는 백건우가 연주할 때면 늘 기도했다. 사람들은 백건우를 ‘건반 위의 구도자’라고 부른다. 이에 대해 백건우는 “음악을 하다 보면 하느님의 힘이 존재한다고 느낄 때가 많습니다. … 음악은 하느님과 가장 가까운 언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종교인들이 보기에는 ‘신’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저는 무대에 오르기 전에 꼭 기도합니다. ‘오늘 이 무대를 내 힘만으로는 완성할 수 없으니 하느님께서 끝날 때까지 도와 달라’고 말이죠. 늘 성수와 십자가를 지니고 다니기도 하고요. 무엇보다 모든 곡을 하느님께 바치는 마음으로 연주합니다.” 백건우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집전한 124위 시복식에서 프란츠 리스트의 ‘새들에게 설교하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를 연주했다.
따뜻한 인간미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윤정희는 신성일과 수많은 영화에 출연했다. 신성일은 정치에 입문해 국회의원이 되었다. 그는 국회의원을 마친 후에 뇌물수수 혐의로 2년 동안 감옥에서 복역했다. 그때의 일화이다. 윤정희 부부는 베토벤에 관한 책을 사 들고 교도소로 면회를 갔다. 신성일에게 베토벤 책을 선물한 까닭은 베토벤만큼 인생에서 고통을 많이 받은 사람이 없고 자기 의지로 승리한 사람이었기에 베토벤에게 힘을 얻으라는 것이었다. 신성일이 교도소에서 출소할 때 모습은 진짜 베토벤처럼 곱슬머리가 되어있었다. 베토벤처럼 변한 것이다.
윤정희의 따듯한 인간미가 담긴 일화가 있다. 1969년 어느 날, 윤정희는 전화 한 통화를 받았다. 전화를 건 사람은 현역 대위로 며칠 전에 베트남에서 귀국했는데 자신의 부하 때문에 전화를 걸었다고 했다. 베트남 전선에서 치열하게 전투를 벌이다가 부하 한 사람이 전사했는데 시신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철모와 주머니에서 온통 윤정희 사진만 나왔다고 했다. 국립묘지에서 거행되는 그 부하의 장례식에 윤정희씨가 꼭 참석해달라는 부탁을 간절하게 했다. 윤정희는 그 이야기를 듣고는 가슴이 아팠다. 그래서 장례식에 참석하겠다고 약속했다. 당시 그녀는 영화 여러 편을 동시에 촬영하고 있어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윤정희는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그 군인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그리고는 그의 유해 앞에서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윤정희가 마지막으로 출연한 영화는 이창동 감독의 ‘시(詩)’였다. 이 감독은 처음부터 윤정희를 주인공으로 생각하고 각본을 썼다. 윤정희는 그 작품을 300여 편의 영화 중에 최고로 꼽았다. 주인공 양미자는 어느 작은 도시에서 중학생 손자와 함께 사는 60대 여성이다. 그녀는 화사한 옷을 좋아하는 소녀 같았다. 우연히 문학 강좌 포스터를 보고 문화원에서 ‘시’ 강좌를 수강한다. 그녀는 시를 쓰면서 그동안 무심히 지나쳤던 것들을 다시 바라보게 된다. 그렇게 아름다움을 하나씩 찾아 나간다. 그런데 예기치 않은 일이 벌어진다. 손자가 저지른 일로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을 받는다. 그 일을 겪으며 현실은 시처럼 아름답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윤정희는 이 영화로 칸 영화제에서 레드카펫을 밟았고, LA비평가협회상 여우주연상을 받는 영예를 얻었다.
꿈꾸듯 편안한 얼굴로 하느님 곁으로
윤정희는 오랫동안 알츠하이머병을 앓았다. 그러다가 프랑스에서 세상을 떠났다. 백건우는 “제 아내이자 오랜 세월 대중의 사랑을 받아온 배우 윤정희가 딸 진희의 바이올린 소리를 들으며 꿈꾸듯 편안한 얼굴로 세상을 떠났다”고 고국에 알려왔다. 장례 미사는 파리 인근 뱅센 노트르담 성당에서 봉헌되었다. 장례 미사에 사용된 음악은 백건우가 직접 선택했다. 가브리엘 포레의 레퀴엠 라단조 48-7번 ‘천국에서’라는 아름다운 곡이었다. 한국 영화의 찬란한 별이었던 윤정희는 그렇게 세상과 작별했다. 윤정희가 마지막으로 출연한 영화 ‘시’의 마지막에 이런 시구가 나온다. “어느 햇빛 맑은 아침/ 다시 깨어나 부신 눈으로/ 머리맡에 선 당신을 만날 수 있기를”
“윤정희 이전에도 윤정희 이후에도 윤정희만한 배우는 없다.”(시인 서정주)
참고자료 : ▲동아일보(2023.1.31) ‘故 윤정희, 파리 장례식 현장 어땠나…눈물 흘리는 백건우·위로하는 이창동’ ▲월간조선(2023.1.20) ‘윤정희 별세… 여배우 트로이카 이끌었던 톱 여배우’ ▲중앙일보(2020.2.18) ‘‘파리의 나혜석’ 윤정희, 루브르박물관서 도둑 촬영’ ▲동아일보(2019.1.25) ‘윤정희 최대 노출작 영화 ‘시’ 만든 사람은 감독 아닌 백건우’ ▲동아일보.(2019.1.11) ‘“오늘 처음 듣네”…45년간 친구이자 부부, 파트너였는데’ ▲신성일. 「청춘은 맨발이다」 문학세계사. 2018 ▲가톨릭신문(2017.10.1) ‘피아니스트 백건우(요셉마리)’ ▲가톨릭신문(2010.6.20) ‘피아니스트 백건우·영화배우 윤정희 씨 부부’ ▲가톨릭신문(2010.5.9) ‘볼만한 새 영화 시’ ▲가톨릭신문(1988.6.19) ‘신자 인기인 탐방 배우 윤정희 씨’ ▲가톨릭신문(1972.12.25, 4.30, 2.6) ‘새남터의 북소리’ ▲가톨릭신문(1971.12.25. 10.31) ‘신앙에 빛 될 「목소리」’ ▲가톨릭신문(1971.2.7) ‘라자로 돕기회 발족’ ▲https://blog.naver.com/oldcine(영화는 인생의 거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