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형찬의 가톨릭 예술가 이야기] (31) 박경리 데레사 (상)
지병이 있었지만 글쓰는 것은 소풍
박경리(데레사, 朴景利, 1926~2008)는 병에 대해 무감각했다. ‘인명재천(人命在天)’이라는 생각을 늘 갖고 있었다. 체하면 바늘로 손톱 밑을 찔러 피를 냈고, 감기 들면 뜰 안을 왔다 갔다 했다. 상처 나면 소독하고 밴드를 붙였다. 병원에 가기가 싫어 약도 안 먹었다. 박경리는 목숨에 연연하지 않았다. 원래 먹어야 하는 약이 많은데 모두 거부하고 오직 혈압약만 먹었다. 한 인터뷰에서 “살아보겠다고 날마다 약 먹고 병원 가고 하는 거, 내 생명을 저울질하며 사는 거 같아서 싫어”라고 솔직하게 말했다.
「토지」를 쓰기 시작하자 유방암에 걸렸다. 3시간에 걸쳐 수술했다. 그러고는 보름 만에 퇴원했다. 퇴원한 날부터 가슴에 붕대를 감고 다시 「토지」를 써 내려갔다. 박경리는 그때의 기분을 ‘소풍 가는 기분’이라 했다. 의사는 그 말을 듣고 어이없어했다. 전쟁 중에 남편은 행방불명되었고, 후에 아들도 죽었다. 가족이라고는 딸 하나밖에 없었다. 박경리는 딸의 결혼 문제를 심각히 생각했다. 자신이 언제 세상을 떠날지 모르기에 어서 딸을 결혼시키겠다고 마음먹었다.
폐에 종양이 생겼다. 설상가상으로 뇌졸중까지 왔다. 반신 마비 증세도 보였다. 병원에서 치료했으나 회복되지 않았다. 항암 치료도 거부하고 연명 치료도 거부했다. 정의채 몬시뇰은 박홍 신부와 함께 입원한 병원을 찾아가 마지막으로 병자성사를 주었다. 그렇게 해서 박경리는 82세를 일기로 흙으로 돌아갔다. 정 몬시뇰은 장례 미사에서 “자연을 노래하고 인간을 사랑했던 고인의 문학작품들은 상처 입은 우리 인간들에게 삶의 올바른 방향을 제시해주었다. 그런 점에서 고인을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과 견줄 수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
대하소설 「토지」
‘박경리’ 하면 「토지」이다. 대하소설 「토지」는 “1897년의 한가위”로 시작해서 “외치고 외치며, 춤을 추고, 두 팔을 번쩍번쩍 쳐들며, 눈물을 흘리다가는 소리 내어 웃고, 푸른 하늘에는 실구름이 흐르고 있었다”로 끝을 맺는다. 구한말과 일제강점기를 거쳐 민족 해방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 소설은 동학농민전쟁, 을사늑약, 청일전쟁, 간도협약, 만주사변 등 근대사의 주요 사건이 줄지어 등장한다. 이러한 소용돌이 속에서 최참판댁의 흥망성쇠와 우리나라 민족사가 속속들이 펼쳐진다.
「토지」의 배경은 경남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와 만주땅 용정이다. 「토지」는 외할머니가 손녀에게 들려준 짤막한 이야기에서 영감을 얻어 쓴 것이다. “거제도 그 끝도 없는 넓은 땅에 누렇게 익은 벼가 그냥 땅으로 떨어지는데 수확할 사람이 없었어. 이유는 전염병인 호열자(虎列剌·콜레라)가 그곳 사람들을 죽음으로 데려갔기 때문이야.” 외할머니의 이야기는 박경리의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박경리는 “삶과 생명을 나타내는 벼의 노란색과 호열자가 번져오는 죽음의 핏빛이 젊은 시절 내내 나의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고 했다. 그 이미지를 글로 쓰기 위해 우리나라 지도를 펼쳤다. 그래서 찾아낸 곳이 바로 평사리 악양 들판이었다. 평사리 모습이 「토지」의 배경과 너무도 흡사해 작가도 놀랐다.
‘집필 기간 26년, 전집 20권, 원고지 4만여 장, 등장인물 700여 명, TV 드라마(KBS 1979년 한혜숙 주인공, 1987년 최수지 주인공/SBS 2004년 김현주 주인공), 영화(1974년 김수용 감독, 김지미·이순재 주연), 오세영 화백의 만화 「토지」, 청소년 「토지」, 영어·일어·프랑스어·중국어 등으로 번역’ 이것이 한국 현대문학의 찬란한 금자탑을 이룬 「토지」가 세운 놀라운 기록들이다.
박경리가 말했다. “어떤 사람이/ 「토지(土地)」를/ 초라하다 했다/ 맞는 말씀이다/ 「토지(土地)」는 매우 화려하지만/ 작가는 초라했다 … 역시 「토지(土地)」는 초라했다.”(박경리의 시 ‘토지(土地)’에서)
박경리 선생 가족사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박경리 선생, 남편 김행도씨, 친정어머니, 그리고 맨 아래 가운데 아이가 김영주씨다. 출처=「박경리 이야기」
훗날 사위가 된 김지하와 만남
1970년대 초, 어느 가을에 시인 김지하는 몇 사람의 문학인과 함께 성북동에 있는 소설가 김동리 집을 찾아갔다. 그런데 출타 중이었다. 그래서 가까운 곳에 있는 박경리 집으로 갔다. 그때가 「현대문학」에 박경리의 「토지」 1부가 발표된 때였다. 「사상계」에 정치풍자시 ‘오적(五賊)’을 써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김지하는 「토지」를 읽어서 박경리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박경리 집에는 모녀가 살고 있었다. 김지하는 후에 장모가 된 박경리에 대한 첫인상을 이렇게 적었다.
“역사 이야기가 나오자 식견이 보통 탁월한 것이 아니었다. … 경상도 전라도 지리산 등등 민감한 지역 문제들에 대해서도 막힘이 없었다. 화엄불교, 동학에도 해박했고 동서양 역사는 물론 한국 현대사까지 줄줄이 꿰고 있었다. … 나는 작가 중에 그렇게 똑똑한 사람을 태어나서 그때 처음 보았다.” 김지하 일행은 박경리 집에서 술을 많이 마셨다. 박경리는 그들을 보내며 또 놀러 오라고 했다. 김지하가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시는 위안
박경리는 범띠 해에 경남 통영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시각이 초저녁이었다. 박경리는 자신의 사주를 이렇게 이야기했다. “…술시라던가 해시라던가/ 아무튼 초저녁이었다는 것이다/ 계집아이의 띠가/ 호랑이라는 것도 그렇거니와/ 대낮도 아니고 새벽녘도 아니고/ 한참 호랑이가 용을 쓰는/ 초저녁이라/ 그 팔자가 셀 것을 말해 뭐하냐…”(박경리의 시 ‘나의 출생’에서)
통영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진주고등여학교로 진학했다. 4년제 여학교를 5년 다녔다. 1년간 휴학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동급생이 상급생이 되고 하급생이 동급생이 되는 ‘기묘한 학교생활’을 했다. 박경리는 이를 ‘동굴 천장에 매달린 박쥐처럼’이라고 했다. 외곬 성격에 소외감은 더욱 깊어졌다. 공부는 잘하지 못했으나 역사에는 흥미가 많았다. 그래서 독서를 ‘야욕스럽게’ 했다. 무엇이든지 읽었다. 그나마 학교생활을 지탱시켜준 것은 ‘시 쓰는 일’이었다. 아궁이 앞에서, 이불 속에서 매일매일 시를 썼다. 후에 박경리는 ‘견디기 어려울 때 시는 위안’이었다고 했다.
졸업 후에 통영 금융조합에 들어갔다. 그러다가 거제도 부잣집 아들이며 일본 중앙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한 사람을 만나 결혼했다. 결혼 후에는 남편의 직장이 있는 인천에서 살았다. 집 한편에 헌책방을 열었다. 그곳이 바로 인천 헌책방 거리로 유명한 배다리이다. 지금도 아벨서점을 비롯해 헌책방 몇 곳이 남아 있다. 박경리는 인천에서 살던 시절이 가장 행복했다고 말했다. 그 후, 서울가정보육사범학교(현 세종대)에 들어갔고 졸업 후에는 황해도 연안여중에서 교편을 잡았다. 6·25 전쟁이 일어나자 남편은 좌익으로 몰려 행방불명되었다. 박경리는 통영으로 피란 가서 양품점을 했다. 전쟁이 끝나자 서울로 올라와 은행과 신문사에서 일하며 글을 썼다.
스승 김동리
박경리가 스승으로 모신 사람은 김동리였다. 박경리는 김동리를 “부모가 저를 태어나게 했다면, 선생님은 작가로 저를 태어나게 하신 어버이십니다”(‘고 김동리 선생님 영전에’에서)라고 했다. 박경리는 자신의 시를 김동리에게 보여주었다. 여학교 친구가 다리를 놓아준 것이다. 시를 읽은 김동리는 “상은 좋은데 표현이 틀렸다”고 했다.
박경리는 상심했다. 이에 김동리는 “소설을 써보면 어떨까?”하고 권했다. 그래서 ‘불안지대’라는 단편소설을 써서 김동리에게 건넸다. 김동리는 소설의 제목을 ‘계산(計算)’으로 바꾸어 「현대문학」에 1회 추천했다. 당시 작가가 되려면 2회 추천을 받아야 했다. 다음 작품으로 ‘흑흑백백’을 써서 「현대문학」에 2회 추천되었다. 박경리는 비로소 작가로 등단했다. 그런데 김동리는 작품 제목뿐만 아니라 작가 이름까지도 바꾸었다. 본래 이름인 ‘박금이’를 ‘박경리’로 바꾼 것이다. 추천이 완료되었다는 기쁜 소식을 들은 날, 불행하게도 아들이 불의의 사고로 병원에서 죽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