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서재에는 오래전에 구입한 안익태(리카르도, 安益泰, 1906-1965)의 ‘한국환상곡’(Symphonic Fantasia KOREA) LP판이 있다. 커버에는 안익태가 교향악단을 지휘하는 흑백사진이 인쇄되어 있다. 서라벌레코드사에서 발매한 것으로 30년은 족히 넘었을 것이다. 이 레코드는 안익태가 미국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을 지휘한 것인데 할리우드 야외음악당에서 녹음했다. 그동안 ‘한국환상곡’을 듣고 싶었으나 턴테이블이 없어 듣지 못했다. 안익태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큰마음 먹고 턴테이블 하나를 구입했다. 역시 LP판으로 듣는 ‘한국환상곡’은 달랐다. 이 곡은 안익태가 독일 베를린에서 작곡해 아일랜드 국립교향악단에 의해 안익태 지휘로 초연되었다. 짧은 곡이지만 고조선 개국부터 시작해 일제강점기 민족의 고통, 독립을 위한 투쟁, 광복의 기쁨, 참혹한 한국전쟁을 다양한 악기로 표현했다.
안익태는 현재 우리가 부르고 있는 ‘애국가’를 작곡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 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일제강점기에 애국지사들이 부른 애국가는 지금의 ‘애국가’가 아니었다. 스코틀랜드 민요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 곡조의 애국가였다. 2021년 광복절에 홍범도 장군 유해 송환식에서 ‘올드 랭 사인’ 곡조의 ‘애국가’가 제창되었다. 안익태는 한 신문사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작곡한 ‘애국가’를 어떻게 불러야 하는지 말했다.
독립의 노래, 통일의 노래, 조국의 노래
“‘애국가’는 한마디로 애국심이 치솟게 한 것입니다. 거기에는 슬픈 데가 조금도 없습니다. 처음부터 ‘동 · 해 · 물과’하고 활발하게 끊어가면서 힘차게 불러야 합니다. … ‘애국가’만은 애국심이 마음속에서 우러나도록 우렁차게 불러야 합니다.” 한 역사학자의 말대로 ‘애국가’는 “독립을 위해 싸우는 광복군에게는 ‘독립의 노래’로, 해방 후 분단된 조국에서는 민족의 통일을 기약하는 ‘통일의 노래’로, 이역만리 타향에서 눈물짓던 동포들에게는 ‘조국의 노래’”였다.
음악적 재능이 탁월
안익태는 평양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교회에 다녔다. 교회에서 음악을 배웠다. 일본으로 유학 간 형이 일곱 살 어린 동생에게 바이올린을 선물해 주었다. 바이올린을 혼자 연습해 찬송가를 연주했다. 그만큼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다. 안익태가 보통학교에 입학했을 때도 형은 빅터레코드 축음기를 사주었다. 트럼펫과 비슷하게 생긴 코넷도 배워 평양에서는 ‘음악 신동’으로 이름을 떨쳤다. 워낙 음악적 재능이 뛰어나 숭실학교(중등교육기관)에 입학해서도 숭실대 밴드부에 입단해 활동했다. 또 형은 안익태에게 첼로를 선물했다. 그 첼로가 안익태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안익태는 첼로도 혼자서 공부했다. 형은 안익태가 서울에서 영국인 첼리스트에게 레슨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러다가 3·1운동이 일어났다. 숭실학교는 3·1운동의 거점 역할을 했다. 숭실학교는 초토화되었다. 안익태는 3·1운동 수감자 구출 운동에 가담했다. 그것이 발각되어 퇴교당했다. 그 후, 안익태는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에서 중등과정을 마치고 동경고등음악학교에 첼로 전공으로 입학했다. 학교에 들어가서는 오직 음악에만 열중해 공부했다. 그런데 부친이 세상을 떠났다. 학비 조달이 어렵게 되었다. 졸업을 앞둔 시기였다. 등록금을 내지 못해 안타깝게 ‘졸업 유예’가 되었다. 그때 미국인 선교사로 일본에 거주하며 메이지대학 피아노 교수였던 어떤 사람이 그 말을 듣고는 안익태의 등록금을 내주었다. 덕분에 안익태는 대학을 무사히 졸업할 수 있었다.
동포들의 선물, 만년필
귀국한 안익태는 국내에서 여러 차례 음악회를 열어 자신의 음악적 역량을 발표했다. 미국 유학을 준비했다. 어머니는 남아 있던 논밭을 모두 팔아 여비를 마련해 주었다.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안익태는 한인교회를 찾아갔다. 한인교회에서 작은 음악회를 열어주었다. 안익태를 돕기 위한 음악회였다. 안익태는 교회 강단에 걸려 있는 태극기를 보았다. 그러고는 교인들과 함께 처음으로 애국가를 불렀다. 그때의 음악회 감격을 안익태는 이렇게 말했다. “강단 위에 올라가 20여 명의 동포 앞에서 약 반 시간 동안 연주하는데 … 동서 사방으로 헤매는 불쌍한 우리 2000만 동포 앞에서 연주하는 느낌이었다. 눈물이 앞을 가렸다.” 그곳 한인 신자들과 함께 부른 애국가는 ‘올드 랭 사인’ 곡조의 애국가였다. 안익태는 술집에서나 부르는 남의 나라 민요를 우리나라 애국가로 부르는 것이 무척이나 수치스러웠다. 그래서 새로운 애국가를 작곡하기로 결심했다.
안익태가 샌프란시스코를 떠날 때 교인들은 애국가 작곡에 사용하라고 만년필을 선물했다. 그 만년필은 애국가를 작곡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 안익태는 이 만년필을 평생 간직했다. “내가 1930년 미국에 도착하였을 때 우리 동포들은 돈을 모아서 나에게 10불짜리 파카 만년필을 사주었는데, 그때 동포들은 이 만년필을 나에게 주면서 이걸 가지고 애국가도 작곡하고 좋은 곡을 많이 쓰라고 격려해 주었다. 나는 그 후 동포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이 만년필로 정성 들여 ‘애국가’를 작곡하였다.”(신한민보에 실린 안익태의 ‘대한국 애국가’에서) 안익태의 이 만년필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나치에게 이용 당한 안익태
안익태의 영어 이름은 ‘Eaktay Ahn(에키타이 안)’이다. 안익태가 동경고등음악학교에 다니면서 연주 활동을 할 때 사용한 이름은 ‘안 에키타이’였다. ‘안익태’를 일본식 발음으로 표기한 것이었다. 이를 다시 서양식으로 바꾼 것이 ‘Eaktay Ahn’이다. 안익태는 ‘안’씨 성을 바꾼 적도 없고, 창씨개명도 하지 않았다.
안익태를 친일 음악가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안익태가 일제 괴뢰국인 만주국 건국 10주년에서 일본 왕에게 바치는 노래 ‘만주국 축전곡’을 작곡했는데, ‘한국환상곡’도 ‘만주국 축전곡’과 비슷하므로 ‘한국환상곡’ 역시 일본 왕에게 바치는 노래와 다름없다고 한다. 그러면서 현재 우리가 부르는 ‘애국가’가 ‘한국환상곡’ 안에 들어있기에 ‘애국가’를 부르면 결국 일본 왕을 찬미하는 것이라는 논리를 편다.
이러한 주장은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계기로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었다. 안익태의 ‘애국가’는 더는 부르지 말아야 한다며 안익태의 친나치 행적까지 파헤친 책까지 출판되었다. 안익태가 대형 일장기와 만주국 국기 밑에서 베를린교향악단과 ‘만주국 축전곡’을 지휘하는 영상도 국내 언론에 보도되었다. 이를 본 국민들은 경악했다. 당시 나치는 이 공연 장면을 선전용 필름으로 만들어 유럽 전역에 배포했다. 이것은 나치의 나팔수 괴벨스의 전형적인 프로파간다(선전) 전술이었다. 안익태는 나치에게 철저히 이용당한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들과 함께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일이 있다. 안익태는 일본 도쿄에서 ‘한국환상곡’을 지휘했다. 연주는 ABC교향악단이, 합창은 일본인합창단이 맡았다. 안익태는 그때의 감격을 이렇게 말했다. “내가 도쿄에서 ‘한국환상곡’을 지휘하면서 일본인 합창단원들이 애국가를 한국말로 부르는 것을 들었을 때의 만족감이란 한국에서 느꼈던 것하고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최고의 감격적인 만족이었소. … 내가 그들 머리 앞에서 군도(軍刀)를 휘둘렀더라면 아무도 노래를 부르지 않았을 것이오. 지휘봉을 드니까 두말없이 노래를 불렀거든. 그것도 아주 열성과 애정과 성실성을 가지고 말이오.”(‘나의 남편 안익태’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