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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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규만큼 대중의 심금을 울리고 사랑받은 배우가 또 있을까

[백형찬의 가톨릭 예술가 이야기] (47) 김진규 마르티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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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벙어리 삼룡’에서 김진규와 최은희. 출처=「내 운명의 별 김진규」




1970년 서울대생 선호 배우 1위
영화 300편 이상 출연
호소력 있는 연기 독보적
신영균·신성일 인기 압도

연극으로 연기 입문
집안 어려워져 일본 입양
양부모 밑에서 고아처럼 생활
죽기 살기로 연극 몰두

‘피아골’ 상영 무산 위기
첫 영화서 주연 맡은 빨치산 
휴머니스트로 나온 게 문제
대사 자르고 상영 허가 대흥행



한 평론가는 김진규(金振奎 1923~1998 마르티노)를 이렇게 평했다. “한국 영화사를 통틀어서 김진규만큼 대중의 심금을 울리고 대중의 사랑을 받은 인기스타가 또 있을까? 그리고 김진규만큼 많은 화제작에 출연한, 작품 운이 좋은 배우가 또 있을까?” 또 어떤 영화 전문가는 “1970년 서울대생들이 선호하는 배우를 조사했을 때 김진규는 1위를 차지했다. 신영균과 신성일을 제치고 가장 나이 많고 활동 시기도 길었던 그가 선두를 차지한 것은 그의 페르소나가 갖는 호소력이 그만큼 크고 지속적이었음을 말해준다”고 했다.

김진규가 출연한 영화는 300편이 훨씬 넘는다. 그중에서 내가 본 영화는 ‘암행어사 박문수’ ‘사명당’ ‘고려장’ ‘다정불심’ ‘팔도강산’ ‘카인의 후예’ ‘성웅 이순신’ 등이다. 주로 중고교 시절에 많이 보았다. 특히 ‘다정불심’은 박종화 원작을 각색해 신상옥이 감독한 작품인데 고려 공민왕과 원나라에서 왕비로 맞이한 노국 공주와의 애틋한 사랑을 그렸다. 특히 공민왕(김진규)이 죽은 노국 공주(최은희)의 초상화 앞에서 처절할 정도로 슬퍼하던 장면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김진규와 많은 영화에 출연했던 최은희는 김진규를 이렇게 기억했다.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에서 그는 고독하고 과묵한 사랑방 손님 역을 맡았다. 나는 그때 대청마루에 앉아 쇼팽의 야상곡을 치는 미망인 역을 했다. 정말 가슴이 뛰었고 연기 이상의 그 무엇이 우리 두 사람 사이를 오갔다.” 또한 “‘벙어리 삼룡’에서는 삼룡 역을 맡은 그는 마님인 나를 구하려고 불길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 충직한 머슴은 나를 들쳐업고 뛰고 또 뛰었다. 심지어 남편 역을 맡은 박노식 씨에게 매를 맞기까지 했다.” ‘벙어리 삼룡’의 감독이었던 신상옥은 생동감을 살리려고 박노식에게 장작개비로 사정없이 김진규를 후려치라고 주문했다. 최은희는 그때 김진규가 얻어맞으면서 지른 비명과 흘린 눈물은 진짜였을 것이라고 했다.

 
영화 ‘애상’에서 김진규. 출처=「한국영화100년100경」



배우 최은희 “사랑방 손님 연기 가슴 뛰었다”

김진규는 충남 서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계모와 사이가 나빴다. 새할머니는 어머니를 괴롭혔다. 어머니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해 자식들을 데리고 친정인 전북 전주로 왔다. 김진규는 그곳에서 외할아버지에게 천자문을 배웠고, 보통학교에 들어갔다. 김진규는 극장 구경을 좋아했다. 전주 극장에 공연이 있으면 책가방을 집에 던져놓고는 극장으로 달려갔다. 그곳에서 입장하는 손님에게 넙죽 절을 하고는 손 좀 붙들고 들어가 달라고 애원했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어느 손님의 손을 붙들고 들어가는데 표 받는 사람이 꼬마(김진규)의 얼굴을 알아보고는 손을 떼어놓고 꼬마를 극장 직원에게 데려갔다. 직원은 꼬마를 지하실로 끌고 가 호되게 혼내주려고 했다. 그때 꼬마의 손을 잡아주었던 그 손님이 나서며 “아이가 얼마나 구경하고 싶었으면 그렇겠느냐?”고 하면서 극장 값을 내주고는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그날 그렇게 구경한 영화가 바로 나운규가 주인공인 ‘아리랑’이었다. 김진규는 보통학교를 졸업하고는 대전중학교에 들어갔다.

집안이 어렵게 되자 일본으로 갔다. 그곳에서 전문학교를 다녔다. 그는 일본인 양부모 밑에서 고아처럼 외롭게 지냈다. 사람이 그리웠다. 그래서 연극 무대를 찾아갔다. 그곳에서 연기를 시작했다. 연기에 죽기 살기로 매달렸다. 일본에서의 생활은 너무도 힘들고 괴로웠다. 끔찍했던 그때를 생각하면 ‘몸이 떨릴 정도’라고 했다.

귀국 후에도 연극 무대에 섰다. 조선악극단이 서울 동양극장에서 뮤지컬 ‘카투사’를 공연했다. 톨스토이의 「부활」을 각색한 작품이었다. 일본에서 제국음악학교를 나온 삼촌이 음악을 맡았다. 삼촌은 조카 김진규를 단역으로 출연시켰다. 그리고 후에 김진규의 부인이 된 이민자도 발탁했다. 후에 ‘한국의 에바 가드너’라고 불린 이민자가 먼저 주연급 배우가 되었다. 김진규는 이민자와 결혼했다. 그 후 삼촌은 무용과 세미클래식을 공연하는 ‘장미 악단’을 만들었다. 그 악단이 단성사에서 ‘아름다운 새벽’이라는 농촌 계몽극을 올렸다. 연일 매진이었다. 예상외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승만 대통령 부부까지 관람했다. 그러다가 6ㆍ25전쟁이 일어났다. 모든 것이 궁핍해졌다. 대중들에게 연극은 사치였다. 자연히 연극인의 삶도 비참해졌다. 김진규는 변하기 시작했다. 다른 여자를 사귀었고 부인에게 술주정과 손찌검을 했다. 부인은 가난과 폭력을 더는 견디지 못하고 집을 나갔다. 그들에게는 어린 아들이 있었다.

 
영화 ‘피아골’ 촬영 현장에서 김진규. 출처=「한국영화100년100경」


귀국 후 연극 큰 성공…전쟁으로 궁핍해진 삶

김진규는 영화 ‘피아골’에서 주인공을 맡았다. ‘피아골’은 그가 처음으로 출연한 영화였다. 지리산 공산 게릴라인 빨치산을 소재로 한 영화였다. 그런데 영화는 개봉하기 전에 난관에 부딪혔다. 정부 검열자는 주인공 빨치산 김진규가 잔혹한 이미지가 아니라 휴머니스트로 나온 것을 문제 삼았다. 반공을 국시(國是)로 삼았던 그 시절에 빨치산은 무조건 악인으로 나와야 하는데 영웅으로 나온 것이었다. ‘공산주의에 대한 비판성 결여’로 결국 상영이 무산되었다. 이에 영화사는 다시 펄럭이는 태극기를 극명하게 부각하고 지적받은 대사 일부를 잘라낸 후에 간신히 상영 허가를 받았다.

또 이런 해프닝도 있었다. 지리산 피아골에서 촬영을 끝낸 연기자들이 그 누더기 군복에 따발총을 맨 채 기차를 타고 서울역에 내렸다. 내리자마자 수사관들에게 붙잡혔다. 그들을 모조리 수사기관으로 끌고 갔다. 연기자들은 졸지에 빨치산 잔당으로 몰리며 취조받았다. 그들은 영화 시나리오를 꺼내 보여주고 따발총이 군에서 빌려준 연습용 총이라는 것을 증명한 후에 간신히 풀려났다. 영화 ‘피아골’은 그해 대박을 터뜨렸다. 그때부터 김진규는 연극배우보다는 영화배우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아내 김보애가 쓴 「내 운명의 별 김진규」.



연기 노트 계기로 김보애와 부부 인연

김진규는 이민자와 이혼하고 혼자 살았다. 그때 영화 ‘옥단춘’을 촬영하고 있었다. 후에 김진규의 아내가 된 김보애도 단역으로 그 영화에 출연했다. 김보애는 어려서 무용가가 꿈이었다. 풍문여고 시절 대학 무용과 교수들이 학교로 찾아와 김보애를 무용과 신입생으로 스카우트했다. 김보애는 서라벌예술대학 무용과 학생이 되었다. 연극을 하고 싶은 마음에 연극영화과로 전과했다. 그곳에서 작품발표회를 끝낸 날에 이를 구경한 한 영화감독이 김보애에게 영화에 출연할 의향이 있는지 물었다. ‘옥단춘’이란 작품이었다.

완고한 부친은 딸의 영화 출연을 반대했다. 부잣집에서 금지옥엽으로 귀하게 키운 딸을 영화판으로 내보내고 싶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 당시 영화배우는 지금과 같이 선망하는 직업이 아니었다. 모친의 도움과 김보애의 ‘단호한’ 행동에 결국 부친은 지고 말았다. ‘옥단춘’은 전라도 광주에서 촬영했다. 김진규가 주인공이었다. 김진규는 분장 전에는 중늙은이 같았으나 분장 후에는 반듯한 선비가 되었다. 얼굴이 ‘조각처럼’ 빛났다. 중후한 연기자로서 카리스마가 넘쳤다. 김보애는 영화 속에서 몸종 역을 했다. 그런데 촬영 도중에 병이 났다. 부친이 연락을 받고는 급히 내려왔다. 김보애가 부친을 따라 서울로 올라가기 전에 김진규는 김보애에게 연기론을 정리한 자신의 노트를 주겠다고 약속했다.

서울에서 건강을 회복한 김보애는 적선동에 사는 김진규를 찾아갔다. 그는 방 한 칸에 세 들어 살고 있었다. 대배우가 그런 곳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갑자기 불쌍한 생각이 들었다. 김진규는 약속대로 연기론 노트를 주었다. 러시아 스타니슬라프스키의 「배우수업」이란 책을 김진규가 나름대로 번역해 요약한 노트였다. 그 노트가 김보애의 운명을 바꾸어놓았다. 김진규는 김보애에게 자신의 슬픈 과거를 모두 털어놓았다. 김보애는 그때부터 김진규에게 연민의 정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를 자신이 보살피겠다고 결심했다. 결국 둘은 결혼했다. 김진규는 김보애를 ‘보애’라 불렀고 김보애는 김진규를 ‘선생님’이라 불렀다. 김보애는 대한민국 최고 스타가 자기 남편이 되었다는 사실에 크게 고무되었다. 갖은 정성을 다해 그를 뒷바라지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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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3-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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