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유학 중 간도 대지진 겪고 인생관 변화
로맹 롤랑 「민중예술론」 읽고 연극의 길
귀국 후 극예술연구회 만들어 신극 운동
‘소’ 사회주의 선동극 몰려 혹독한 고문
해방 후 3·1운동 이야기 ‘조국’ 무대에
초대 국립극장장…연출작 ‘뇌우’ 대성공
1970년대 초, 서울 남산에 있는 드라마센터에서 연극 ‘금관의 예수’가 공연되었다. 무대에는 머리에 금관을 얹은 예수 입상 하나, 그리고 나병 환자, 걸인, 매춘부, 순경, 사장, 수녀, 신부 등 갖가지 인간상이 등장해 황금만능주의에 대한 사회 정의의 타락과 위선을 이야기한다. 또한 썩어빠진 사회 현실 앞에 무기력한 종교의 모습도 드러난다. 이 작품은 가톨릭 단체인 ‘한국 팍스 로마나’가 주최하고 가톨릭시보사와 한국정의평화위원회의 후원으로 공연되었다. 예전부터 종교단체는 선교의 수단으로 연극을 활용해 왔다. 그래서 종교단체에서 올리는 연극은 성스럽고 계몽적인 내용이 일색이었다. 그런데 가톨릭 단체가 위선적인 그리스도인을 질책하며 가톨릭을 정면으로 비판한 연극을 올린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유치진(돈 보스코, 柳致眞, 1905~1974)은 자신이 건립한 드라마센터에서 공연된 ‘금관의 예수’를 보고 다음과 같은 평을 했다. “예수는 외롭다. 왜? 예수는 황금이나 권력에 눈이 어두운 자들에게 둘러싸여 그들이 자기의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예수를 팔며, 그러기 위해 입상의 머리 위에 금관을 씌워 놓았다. 정작 예수의 사랑과 자비가 필요한 사람들 그리고 굶주리고 헐벗고 가난한 사람들에게서는 멀리 격리되어 그들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병고와 굶주림에 못 견디던 나병 환자가 하루는 콘크리트 예수의 입상 머리 위에서 금관을 발견한다. 그 황금 덩어리가 탐이 나서 훔치려 든다. 콘크리트 입상이 입을 연다. ‘가시관이 마땅한 내게는 금관은 아무 소용없다. 그 금관을 가지고 가라. 이왕이면 내 전신을 싸고 있는 콘크리트를 벗겨 나를 황금광과 권력광으로부터 해방시켜 나를 병들고 가난하고 외로운 사람들의 친구가 되게 해 달라’ 이 얼마나 오늘의 격하되어 가는 교회에 대한 대담하고 신랄한 비판인가?”
“얼어붙은 저 하늘 얼어붙은 저 벌판/ 태양도 빛을 잃어 아 캄캄한 저 곤욕의 거리/ 어디에서 왔나 얼굴 여윈 사람들/ 무얼 찾아 헤매이나 저 눈 저 메마른 손길/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 우리와 함께하소서.” 연극 ‘금관의 예수’에서 부른 이 노래는 시인 김지하가 작사하고 김민기가 작곡했다. 그리고 양희은이 노래를 불렀다. 이 노래는 한때 저항의 노래로 많이 불렸다.
허약했던 어린시절 죽음 자주 생각
유치진은 구한말 풍운이 몰아치던 위태로운 시기에 경남 통영에서 태어났다. 그는 맏아들이었고, 시인 청마 유치환이 동생이었다. 유치진은 심신이 허약했다. 한번은 보통학교 자연 시간에 선생님이 지진과 해일에 대해 설명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는 무서워서 바닷가에 나가지 못했고, 산등성이에도 올라가지 못했다. 유치진은 키만 컸지 몸은 마르고 다리가 길었다. 그래서 친구들이 ‘기린’이라고 놀렸다. 병치레도 잦아 감기, 소화불량, 배탈, 설사를 몸에 달고 살았다. 그래서 어린 나이에 죽음을 자주 생각했다.
쇼펜하우어와 니체 책 즐겨 읽어
학교를 졸업하고 통영우체국에서 일했다. 유치진은 부친에게 일본으로 유학 가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부친은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3·1운동이 일어났다. 횃불 들고 만세 부르던 사람 중에 동창생이 있었는데 일본 순사에게 체포되어 고문당해 옥사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를 본 부친은 아들의 일본 유학을 허락했다. 유치진은 일본 도야마 중학에 입학했다. 철학책을 많이 읽었다. 특히 쇼펜하우어와 니체의 책을 즐겨 읽었다. 그러다가 유치진의 인생관을 크게 바꾼 사건이 일어났다. 진도 7.9의 간토 대지진이 일어난 것이다. 도쿄와 요코하마를 비롯한 간토 일대가 초토화되었다. 사망자와 행방불명자가 40만 명에 이르렀다. 이때 ‘일본인을 살해하기 위해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약을 넣었다’는 소문이 급격히 돌았다. 일본인들은 총과 칼 그리고 죽창을 들고 닥치는 대로 조선인을 죽였다. 이렇게 희생된 조선인은 1만 명 가까이 되었다. 유치진은 그 잔인함에 치를 떨었고, 피압박 민족의 설움을 강하게 느꼈다.
중학을 졸업하고 릿쿄대학 영문과에 입학했다. 릿쿄대학은 세인트 폴 대학으로 알려진 일본 최대의 기독교 계열 대학이었다. 유치진은 그곳에서 프랑스 극작가 로맹 롤랑의 「민중예술론」에 깊이 빠졌다. 이 책은 조국과 민족을 위해 일해야겠다는 유치진의 막연한 생각에 구체적인 방향을 제시해주었다. 그래서 일생동안 연극을 하기로 결심했다. 이후 유치진은 극장을 많이 찾아다녔다. 그러면서 안톤 체호프와 셰익스피어 희곡을 읽었고, 스타니슬라브스키 「배우론」도 공부했다. 오랜 세월 영국의 식민지 지배받으며 수치와 고통을 겪은 아일랜드 연극에 마음이 와 닿았다. 그래서 만나게 된 인물이 숀 오케이시였다. 그의 작품에는 가난한 동포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울분이 담겨있었다.
유치진은 유학을 마치고 귀국했다. 김진섭, 이하윤, 서항석, 이헌구, 함대훈 등과 함께 ‘극예술연구회’(극연)를 만들었다. 극연은 해외 근대극을 번역해 공연하면서 신극 운동을 펼쳤다. 정지용, 김동인, 현제명, 변영로, 이희승 등이 찬조 회원으로 가입하면서 극연은 단순한 공연단체가 아닌 민족운동의 성격도 띠게 되었다. 극연은 유치진의 ‘토막’을 무대에 올렸다. 유치진은 연출 공부를 하기 위해 다시 일본으로 갔다. 그곳에는 김동원, 이해랑, 이진순, 황순원 등의 유학생이 있었다. 그들과 함께 ‘조선의 민족의식을 일깨우고 신극 문화를 만들어 나간다’는 목표로 동경학생예술좌를 만들었다. 첫 공연으로 유치진의 ‘소’를 올렸다.
고문 후유증으로 병 얻고 정신 황폐화
귀국 후, 경성미술학교 영어 교사로 교편을 잡았다. 그곳에서 미술을 가르치던 심재순을 만나 결혼했다. 심재순의 집안은 명문가였다. 친할아버지는 고종 황제와 이종사촌으로 이조판서를 지냈고, 외할아버지는 참정대신을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형사들이 유치진의 집으로 들이닥쳤다. 그리고는 종로경찰서로 연행해 갔다. 일본에서 공연한 ‘소’가 사회주의 선동극이라며 그 배후를 대라고 혹독하게 고문했다. ‘소’는 농촌의 붕괴와 농민의 몰락을 묘사한 순수 농촌극이었다. 유치진은 당시 고문의 후유증을 “육체적으로는 불치의 신경통이라는 고질병을 안겨주었고, 정신적으로 황폐할 정도여서 나로 하여금 모멸감을 갖도록 해줌과 동시에 잃어버렸던 유년 시절의 공포를 다시 불러일으켰다”고 했다. 조선총독부는 유치진에게 일제에 협력할 극단을 만들라고 협박했다. 이를 거절하자 경찰서로 연행해 일주일 동안 심문했다. 그리하여 국민연극을 내세운 ‘현대극장’이 급조되었다. 첫 작품으로 유치진의 ‘흑룡강’을 올렸다. 이는 일제의 분촌 정책을 합리화한 작품이 되었다. 이 때문에 유치진은 심한 자괴감과 수치심으로 괴로워했다.
해방 후에 유치진은 3·1운동 이야기를 다룬 ‘조국’을 썼다. 그 작품은 우여곡절 끝에 국제극장 무대에 올랐다. 유치진은 이에 대한 감격을 “해방 이후 내 작품이 처음으로 무대에 올라가는 감격은 무어라 표현할 길이 없었다. 일제 말엽 치욕스런 국책극을 하는 가운데 ‘북진대’를 공연한 뒤 자못 5년여 만에 정말 내가 하고 싶은 주제의 작품을 무대에 올렸다는 사실에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다. 이후 유치진은 한국무대예술원 원장에 취임해 ‘전국연극경연대회’를 개최했고, 연극학회를 창립했다. 그리고 정부에 부민관(현 서울시 의회)을 국립극장으로 만들자는 건의를 해 이것이 받아들여졌다. 유치진은 초대 국립극장장으로 임명되었다. 국립극장의 개관작품으로 유치진의 ‘원술랑’이 공연되었다. 이어서 ‘만리장성’, ‘춘향전’ 등을 계속 올리면서 대성공을 거두었다. 특히 ‘뇌우(雷雨)’는 유치진이 직접 연출을 맡았는데 표를 사려는 사람들이 정동까지 늘어설 정도로 연극 공연 역사상 신기록을 수립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