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를 여행하다 보면 가끔 난처할 때가 있다. 피렌체의 경우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을 처음 보면 규모에 놀라는 한편, 너무 마구 드러낸 남성(?)에 민망함을 느끼게 된다. 사진상으론 너무나 유명한 작품인지라 익숙할 만도 한데 실제 보면 적응이 쉽지 않다.
그뿐인가, 바티칸미술관 회랑에 줄지어 서 있는 로마 신들은 거의 다 누드다. 간혹 돌출 부위다 보니 잘려나간 것도 있지만, 의도적인 숨김은 없다. 물론 대부분 선정적이지는 않지만 대놓고 감상하기가 좀 그렇다. 미술관의 그림은 어떤가. 라파엘로의 ‘성모자상’을 보면 아기 예수님과 요한 세례자는 스스럼없이 주요 부위를 드러내놓고 있다. 아무리 그리스 로마의 문화를 다시 부흥하고자 했던 르네상스 시대임을 감안한다 해도 온 유럽이 천주교가 국교인 당시에 아기 예수님을 발가벗긴 그림이 수용되었다는 게 지금의 시각으로도 놀랍기까지 하다.
후대에 와서 변화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보티첼리 문하에서 그려진 ‘천사가 함께 있는 성모자’를 보면 아기 예수님의 심벌을 장미꽃을 그려서 가렸다. 브론치노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성가정상’의 경우에는 원작의 그곳을 아예 천으로 덮어버리기도 하였다. 그 이유는 단지 교회 그림으로 정숙하지 못하다는 판단에 따른 조치라고 해석할 수 있다. 현재 우리의 생각으로는 미술작품에 무언가 덧그린다는 것을 감히 생각하기 어렵지만, 당시 종교화의 기능을 고려하면 그 가능성을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가 처음 이 성모자상을 그릴 때에는 별 부담이 없었을 수 있다. 그러나 후대에 사회적으로 종교관이 엄숙한 쪽으로 바뀌거나 종교 지도자가 불경하다고 판단하면 별도의 수정 조치가 필요할 것이다. 물론 작가의 작품 위에 제3자가 무엇인가를 그려놓았다는 사실만 보면 분명 원작 훼손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당시 시대정신과 종교관을 대변하는 교회 결정에 의한 조치였다면 소수집단이나 개인에 의해 자행된 문화재 훼손과는 달리 생각해야 한다.
브론치노의 작품 속 베일은 추후 복원 과정에서 다시 제거됐다. 시대상을 반영한 역사적 흔적일 경우 작가 편에 서서 작품의 오리지널리티를 찾아주어야 한다는 설득력이 약해진다. 만약 그 흔적을 제거하면 그림에 남아있는 역사성은 영원히 소멸되고 말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기 예수님의 심벌을 가리고 있던 베일을 벗겨내야 할지, 놔두어야 할지에 대해 신중한 고려가 필요하다. 이처럼 미술품에 남아있는 역사적인 흔적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의 문제는 문화유산에 대한 보존의 방향을 설정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포인트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