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재준 그레고리오의 음악여행] (32)
주님 공현 대축일은 가톨릭 신앙인으로서 매우 중요한 기념일이다. 공현(公顯)은 ‘공적으로 드러남’을 뜻하며,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세상의 구원자이심을 세상에 알린 것을 축하하는 기념일이다. 특히 예수님께 경배하는 세 명의 동방 박사를 통해 유다인뿐만 아니라 모든 세계를 구원하시는 주님의 권능을 상징하고 있다.
‘동방 박사들의 경배’ 이야기는 네 복음서 중 유일하게 마태오 복음서에만 수록되어 있으며, 이들이 아기 예수님께 바친 황금과 유향·몰약은 ‘왕권’과 ‘그리스도의 신성’ ‘인류를 위해 희생하실 그리스도’를 각각 상징한다. 현대 신학의 거장 칼 라너(Karl Rahner, 1904~1984) 신부는 동방 박사의 예물이 구세주 아기 예수님의 신비를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되신 하느님께 드리는 합당한 우리의 희생, 인간으로서 우리의 자세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그는 황금은 ‘우리의 사랑’을, 유향은 ‘우리의 그리움’을, 몰약은 ‘우리의 고통’을 의미한다고 강조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2018년 주님 공현 대축일 미사에서 한 강론도 주목할 만하다. “동방 박사들은 계속해서 하늘을 관찰하면서 위험을 무릅쓰고 그리스도에게 드릴 선물을 갖고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찾기 위해서 우리는 위험에 대한 공포와 자기만족, 인생에서 무엇인가 더 찾지 않으려는 나태함을 이겨내야 합니다.” 성하께서 하신 말씀은 주님의 공현을 위해 스스로 찾아 나서는 용기와 신념이 중요하며 항상 밝은 눈으로 부지런히 주님을 좇아야 한다는 뜻이다.
주님 공현을 위해 찾아온 동방 박사를 노래한 작품이 그 유명한 ‘오 거룩한 밤’이다. 1847년 시인이자 와인 상인인 플라시드 카포가 만든 시에 발레곡 ‘지젤(Giselle)’로 유명한 아돌프 아당(Adolphe Charles Adams)이 곡을 붙였다. 아돌프 아당은 프랑스 작곡가이며 오페라와 발레 음악에서 큰 족적을 남겼다.
‘오 거룩한 밤’은 아름다운 가사와 경건하고 순수한 멜로디로 처음 연주되자마자 수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었지만, 교회에선 곧바로 금지령을 내렸다. 사회주의자였던 작사가와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는 유다인 혈통의 작곡가가 만든 작품을 성스러운 교회에서 연주하면 안 된다는 주장이 힘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공현을 위해 먼 길을 찾아온 세 명의 동방 박사는 이교도들이었고, 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아보았기 때문에 세상 모든 이가 구원의 희망을 얻게 되었다. 예수님을 알아보고 경배한 최초의 사람들은 율법학자·교회 지도자·왕족이 아닌 이방인이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지금 ‘오 거룩한 밤’은 교회를 뛰어넘어 전 세계에서 함께 부르는 화합과 평화의 상징이 되었다.
파바로티 ‘오 거룩한 밤’
//youtu.be/UWchHkQUwRw?si=6w3YVREQzQ3MMFfK
작곡가 류재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