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자 이중배(마르티노)는 신유박해로 감옥에 갇혔을 당시 침술로 많은 환자를 치료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뾰족한 ‘침(鍼)’의 느낌을 살린 서체로 복자의 이름을 새겼습니다.”
“순교성인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만 번이라도 죽겠다’는 성인들의 결연한 뜻을 자주 만나게 됩니다. 이 신앙을 후대에 물려줘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돌에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새겨 예술로 승화하는 전각 그룹 ‘새기는 사람들, 석지랑(石志廊)’(지도 의정부교구 김영욱 블라시오 신부)의 세미나 현장. 작가들이 책과 노트, 태블릿 PC 등을 앞에 놓고 각자 준비해 온 내용을 발표한다. 책상 한편에는 새김 작업에 쓰이는 돌과 전각 칼 등이 놓여 있다.
석지랑은 순교자 성월을 보내며 한국교회 103위 순교성인과 124위 복자를 비롯해 고(故)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과 고(故) 브뤼기에르 주교, 고(故) 방유룡(레오) 신부 등 총 230명의 이름을 기억하기 위한 프로젝트 ‘하늘에 새기는 이름’을 진행 중이다.
이번 프로젝트는 지난 2022년 세월호 참사 희생자 304인의 이름을 새긴 ‘다시 부르는 이름들’에 이은 두 번째 작업이다. ‘새김 예술(Engraving Art)’ 작가로 캘리그라피와 전각을 하는 유임봉(스테파노) 작가를 주축으로 모인 이들은 ‘과거를 선명하게 볼수록 현재를 더 선명하게 볼 수 있다’는 믿음으로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지도 사제를 비롯한 강민경(리아)·김미리(요세피나)·김희영(크리스티나)·문선미(헬레나)·박은혜(로사)·이세웅(베드로)·이승희(실비아)·정언래(스테파니아)·정진욱(마리오)·조항윤(아우구스티노) 등 12명의 작가는 월 3회 정기 세미나를 통해 각자 맡은 인물에 관한 연구와 묵상을 나누고 있다. 내년 9월 예정된 전시까지 세미나뿐 아니라 성지 순례를 함께하며 신앙 선조들의 발자취를 따라간다.
작가들은 피상적인 지식으로 알고 있는 우리 신앙의 역사를 깊이 조명한다. 단순히 이름을 기록하는 것이 아닌 ‘한 사람의 삶’을 깊이 탐구함으로써,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를 되돌아보고 성찰하게 한다. 이 작업을 통해 ‘과거와 현재’ 그리고 ‘신앙과 삶’은 연결된다.
3~5cm 남짓한 작은 인장에 이름과 세례명을 새겨 넣는 데는 약 일주일의 시간이 걸린다. 연구 단계부터 인면(印面)과 서체 디자인, 실질적인 새김 작업에 이르기까지 수천 번의 손길 끝에 하나의 인장이 완성된다. 이 과정에서 각기 다른 서체와 새김 기법을 지닌 작가 고유의 개성이 드러나, 다채로운 결과물을 만들어 낸다.
문선미 작가는 “순교 성인과 복자들의 삶을 알고 나니, 그들의 결정에 따른 무게가 새로 다가왔다”며 “최근 다녀온 성지 순례에서는 모든 발걸음이 순교로 가는 길처럼 느껴져 스스로의 신앙생활에 중요한 전환점이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유임봉 작가는 “함께 작업하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작가들의 신앙이 더 깊어지는 것을 느낀다”며 “끝없는 박해에도 숭고한 삶을 지켜온 선조들을 통해 지금까지 이어져 온 한국교회의 역사와 유산을 기억하며 많은 사람과 함께 나누고 싶다”고 전했다.
황혜원 기자 hhw@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