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는 형벌이나 죽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죽음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과 신앙의 증언이 순교의 본질입니다.”(293쪽)
짧지만 강렬한 이 문장은 저자가 독자에게 던지는 메시지를 집약한다. 흔히 ‘순교’라 하면 박해 시대의 잔혹한 죽음이나 피 흘리는 장면을 떠올린다. 그러나 순교자의 이야기를 단지 과거의 영웅담으로만 읽는다면 신앙은 오늘의 삶과 멀어질 수 있다.
「순례길 떠나는 이들에게」는 한국 천주교회의 뿌리를 따라가며, 신앙 선조들의 삶과 순교를 오늘의 언어로 되살려 독자에게 질문을 던진다. 피 흘림을 단순히 기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지금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신앙을 살아내며, 어떻게 신앙을 ‘증언’할 것인지를 묻는다.
전주교구 개갑장터순교성지 담당 사제인 저자는 전국에서 찾아오는 순례자들을 만나며 깨달은 바가 있다. “비록 현재를 살지만, 마음의 시간을 통해 과거 어느 순간의 이야기를 다시 체험하는 것이 순례의 좋은 경험이 될 수 있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신앙 선조들의 삶을 마치 옆집 아저씨나 아주머니가 쉽게 들려주는 이야기처럼 한 편씩 풀어내기 시작했고, 그 글을 모아 책으로 엮었다.
책의 가장 큰 특징은 ‘순교’를 키워드로, 역사와 신앙의 만남을 생활의 언어로 풀어냈다는 점이다. 저자는 교우촌의 삶, 박해 시대의 신앙 고백, 성모성월의 기원, 순교자의 영성, 성해 공경 등 다양한 주제를 이야기체로 전한다.
그러나 단순히 박해 시대의 시점에 머물지 않는다. 그는 “신앙 선조들의 삶 전체가 이미 순교의 준비였고, 작은 선택과 실천이 쌓여 죽음조차 사랑의 증언으로 바뀌었다”고 강조한다. 순교는 특별한 영웅들의 행위가 아니라, 일상의 작은 희생과 나눔 속에서도 드러날 수 있는 신앙의 길이라는 것이다.
책은 네 부분으로 구성된다. 첫째, ‘시간의 길을 걷다’에서는 조선 후기 교회의 역사적 장면들을 되짚는다. 둘째, ‘사랑의 길을 걷다’에서는 신앙인의 선택과 태도를 다룬다. 셋째, ‘부르심의 길을 걷다’에서는 사제·수도자·평신도가 함께 교회를 일궈온 여정을 조명한다. 마지막으로 ‘순교에 대한 짧은 단상’은 저자의 묵상을 통한 순교 영성의 본질에 대한 성찰이다.
칼과 포박, 옥중 고문은 사라졌지만 오늘날의 신앙인은 또 다른 도전에 직면해 있다. 물질적 풍요와 성공 지향적 가치관 속에서 신앙은 쉽게 뒷전으로 밀려난다. 저자는 바로 이 지점에서 신앙인의 작은 선택과 증언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또 순교의 본질은 과거의 극적인 죽음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일상적 삶 안에서도 드러날 수 있는 사랑의 증언임을 역설한다.
저자는 단순한 교회사 해설서나 성지 안내서를 넘어, 순례자의 눈으로 한국교회의 역사를 풀어내며 독자로 하여금 직접 순례길을 걷는 듯한 체험을 선사한다. “순례는 단순히 길을 걷는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삶을 성찰하는 길이며, 새로운 결단으로 다시 살아갈 힘을 주는 은총의 여정”(6쪽)이라는 말은 성지순례에 나서는 우리의 발걸음을 새롭게 한다.
강석진 신부는 머리말에서 “머리가 아니라 마음으로 읽기를 권한다”며 “책을 통해 그 어떤 역사적 사실이든 ‘평범함’과 ‘단순함’의 관점에서 ‘사료의 이면’을 차분히 돌아본다면, 마치 ‘숨겨진 보물’을 찾는 것처럼 설레는 마음이 순간순간 일어날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