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탄불 블루 모스크에서 바라본 성 소피아 성당. 비잔틴 건축 양식에 이슬람을 상징하는 네 개의 첨탐이 더해진 모습이다.
레오 14세 교황이 27일부터 12월 2일까지 튀르키예와 레바논을 찾는다. 교황 즉위 후 첫 해외 사목 방문으로, 올해 니케아(현 튀르키예 이즈니크) 공의회 1700주년을 맞아 교회 일치를 구현하겠다는 의지다. 27일 튀르키예 수도 앙카라에 도착한 교황은 종교 간 대화를 위해 28일부터 이스탄불에서 본격적인 사목 일정에 나선다. 그런데 왜 이스탄불에서일까?
비잔틴 건축 걸작 ‘성 소피아 성당’
313년 밀라노 칙령을 통해 그리스도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330년 로마 제국의 수도를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옮겼다. 4세기 말 테오도시우스 1세가 자신의 두 아들이 다스리도록 로마 제국을 동서로 나눈 뒤 5세기 중반 서로마 제국은 멸망했지만, 동로마 제국은 1453년 오스만 제국이 들어서기 전까지 천 년간 중세 그리스도교와 동방 교회의 중심이 됐다. 오스만 제국의 수도 역시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이스탄불로 이름만 바뀌었을 뿐이다.
지금의 이스탄불은 보스포루스 해협을 사이로 유럽과 아시아가 만나고,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의 문화가 공존하는 이색적인 도시다. 특히 성당 건축과 성화로 대표되는 비잔틴 예술의 걸작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이다. 그 선봉에 성 소피아 성당이 있다. 레오 14세 교황이 이번 사목 방문에서 지역 교회 및 그리스도교 공동체 지도자들과 비공개 회동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그리스어 ‘하기아 소피아(Hagia Sophia)’에서 유래한 ‘성 소피아(Sancta Sophia, 라틴어)’ 성당은 ‘성스러운 지혜’라는 뜻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현지에서는 ‘아야소피아’(Ayasofya, 튀르키예어)로 불린다. 지금의 성당은 같은 자리에 세워진 세 번째 건축물이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건축을 명한 첫 번째 성당은 360년 콘스탄티누스 2세 때 완공됐다. 그러나 404년 폭동으로 불타 테오도시우스 2세에 의해 다시 지어졌다. 이마저도 532년 니카의 반란 중 화재로 소실됐다. 지금의 성당 구조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반란을 진압하자마자 재건을 시작해 537년 완공한 것이다.
니케아 공의회 이후 바실리카는 교회 건물의 표준 모델이 됐다. 국내 및 유럽에서 방문하는 역사적인 성당의 내부 구조다. 비잔틴 건축 역시 기본적으로 바실리카 양식을 따르지만, 성당 중앙을 정사각형으로 조성하고 그 위에 대형 돔을 올리는 차이가 있다. 이른바 그릭 크로스(Greek Cross) 구조로 안정감을 주며, 중앙 돔 외에도 여러 개의 돔을 만들어 조화를 이룬다. 이 양식은 이후 이슬람 사원인 모스크 건축에도 계승됐다. 성 소피아 성당과 지척에 있는 블루 모스크(1617년 완공)의 구조가 비슷한 이유다.
당대 뛰어난 건축공학자들의 노력과 제국 각지에서 조달된 석재로 6년이 채 안 되는 기간에 지어진 성 소피아 성당은 비잔틴 건축을 대표하는 걸작으로 지금껏 사랑받고 있다. 회중석 위의 중앙 돔은 그 지름이 약 31m, 바닥에서 천장까지의 높이가 57m에 달하며, 중앙 돔 하단부에 있는 40개의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이 신비로움을 자아낸다. 중앙 돔과 돔을 지지하는 기둥 및 벽면에는 수많은 성화가 새겨져 있다. 비잔틴 예술을 대표하는 모자이크 및 프레스코화다. 모자이크는 다양한 색깔의 돌·유리·조개껍데기 등을 사용했고, 사이사이 금박의 조각을 넣어 금빛 성스러움을 표현했다.
1 심판의 날 예수님께 인류를 구원해 달라고 성모 마리아와 요한 세례자가 간청하는 모습이다
2 예수님이 왼손에는 성경을 들고 오른손을 들어 축복하고 있다.
3 성 소피아 성당 내부. 대형 돔 아래 귀퉁이에 세라핌이 새겨져 있다. 곳곳이 모스크로 개조됐다.
4 천으로 가려진 성모자상은 무슬림이 기도하는 1층에서는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성모자를 중심으로 왼쪽에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성 소피아 성당을, 오른쪽에는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상징하는 건축물을 들고 있다.
회칠 벗겨내고 복원한 모자이크 성화
성당 내부를 좀더 자세히 들여다 보면 중앙 돔 아래 귀퉁이에 세라핌이 그려져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사진3 참조) 과거 제단 위인 돔 안쪽에는 성모님과 아기 예수님의 모습도 있다.(사진4 참조) 성상 파괴가 한창이던 9세기에 제작된 모자이크화인데, 지금은 천으로 가려졌다.
성당을 대표하는 작품은 1261년에 만들어진 모자이크화로 절반 이상이 훼손됐다. 심판의 날 왼쪽의 성모 마리아와 오른쪽의 요한 세례자가 중앙의 예수님께 인류를 구원해 달라고 간청하는 모습이다. 벽화의 오른쪽 아래에는 복원된 소형 그림이 걸려 있다..(사진1 참조)
푸른 옷을 입은 예수님 양쪽으로 콘스탄티누스 9세와 조에 황후의 모습을 담은 작품도 있다. 예수님은 왼손에 성경을 들고, 오른손을 들어 축복하고 있다. 얼굴 뒤로 십자가형 후광이 비치고, 그 좌우로 예수 그리스도를 뜻하는 그리스어 약자 IC와 XC가 새겨져 있다..(사진2 참조)
출구 바깥쪽 위에는 성모자와 두 황제의 모습이 담겨 있다. 아기 예수님을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를 중심으로 왼쪽에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성 소피아 성당을, 오른쪽에는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상징하는 건축물을 들고 있다. 10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알려진다..(사진5 참조)
압도적인 이들 성화에도 가톨릭 신자에게는 성 소피아 성당이 낯설게 느껴질 수 있다. 익숙한 바실리카 양식이 아닌 데다 십자가나 제대마저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성 소피아 성당은 정치적·종교적으로 변화무쌍한 이스탄불의 역사를 온몸으로 겪었다. 1204년 제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한 뒤 라틴 제국을 선포했을 때는 50여 년간 가톨릭 성당으로 바뀌었고, 1453년 오스만 제국이 들어서면서부터는 481년간 모스크로 변경됐다. 20세기 튀르키예 공화국에 이르러 1934년부터는 박물관으로 세계인을 맞았으나, 2020년 다시 모스크로 전환됐다.
오스만 제국 시절 성당의 십자가는 내려졌고, 벽면을 장식하고 있던 수십 개의 성화도 회칠로 덮였다. 이슬람 건축 양식에 따라 계단 형식의 설교단인 민바르와 메카의 방향을 나타내는 벽감인 미흐랍이 추가됐고, 외부에는 네 개의 첨탑 미나렛도 더해졌다. 그나마 지금 감상할 수 있는 성화는 박물관으로 바뀌었을 때 회칠을 벗겨내고 복원한 것이다. 이슬람 문화 속에 여전히 숨 쉬고 있는 그리스도교의 숨결인 셈이다.
기자가 방문했던 2025년 10월에는 무슬림이 아닐 경우 2층만 개방돼 성당과 성화를 온전히 볼 수는 없었다. 성 소피아 성당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모자이크 성화를 만끽할 수 있는 코라 구세주 성당은 다음 주에 만나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