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2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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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속 예술, 예술 속 신앙] 오페라 ‘성 알렉시오’ - 계단 아래 성인, 눈먼 우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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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 14세 교황님의 첫 권고 「내가 너를 사랑하였다」를 읽었다. 선종하신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준비하시던 내용을, 레오 14세 교황님이 이어받아 발표한 것이다. 말 그대로 ‘사랑의 계승’이라 부를 만한 문헌이다.


인상적인 것은 제목이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마지막 회칙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Dilexit Nos)」와 「내가 너를 사랑하였다(Dilexi Te)」. 두 문장은 서로를 비추는 거울 같았다. 전자가 인류를 극진히 사랑하셨던 예수 성심을 논한다면, 후자는 우리가 사랑을 실천하며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가를 되묻는다.


새해를 맞아 이 질문은 새롭게 다가온다. 그리고 1632년 이탈리아 로마에서 초연된 종교 오페라가 떠올랐다. 스테파노 란디(Stefano Landi)가 작곡한 <성 알렉시오(Il SantAlessio)>다. 


알렉시오는 원로회 의원의 아들로 부와 명예를 포기하고 시리아로 건너가 수행했다. 이후 그는 로마로 돌아와 가족에게 정체를 숨기고 자신의 집 계단 아래에서 걸식하며 살았다고 전해진다. 성인은 완전한 ‘자기 비움’(k?n?sis)과 겸허를 표상하며, 동방과 로마를 잇는 상징적 가교이기도 했다.


이 작품은 바르베르니 가문의 후원으로 탄생했다. 교황을 배출했던 그들은 피렌체 메디치 가문과 같은 예술 후원자 역할을 자처하였다. 교황 가문답게 바르베리니는 신앙과 성인 이야기에 주목했다. 우르바노 8세 교황의 조카 바르베리니 추기경은 음악의 열정적 후원자였고, 이 오페라는 그의 주도하에 제작되었다.


당시는 종교개혁에 맞선 가톨릭 개혁의 시대였다. 작품이 선보인 1630년대, 교회의 주된 관심사는 ‘성인’이었다. 1610년 가롤로 보로메오, 1622년에는 이냐시오 데 로욜라,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필립보 네리, 아빌라의 예수의 데레사가 시성됐다. 성인들의 깊은 신심과 덕행, 영웅적 선교 활동은 신자의 모범으로 강조되고 선전됐다.



대본은 훗날 클레멘스 9세 교황이 되는 줄리오 로스피글리오시가 맡았다. 이는 단순한 극작이 아니라, 신학과 교회론적 메시지를 품은 오페라였음을 의미한다. 예수회 드라마의 자취가 드러난다는 점도 흥미롭다. 예수회 학교는 선생이나 교수가 직접 각본을 쓰고, 제자들이 배우가 되어 영적 투쟁이나 성모·성인에 대한 연극을 선보이곤 했다. 


이는 학생에게 수사학과 교리를 동시에 학습시키고, 그리스도교적 가치를 생생히 드러내는 역할도 수행했다. 작곡가 란디가 예수회가 운영하던 콜레키움 게르마니쿰(Collegium Germanicum) 대학에서 보이 소프라노로 활동했던 이력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이 오페라는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 전통에 따라 여성 가수를 기용하지 않았다. 알렉시오는 소프라노 카스트라토, 악마는 베이스가 불렀는데, 둘의 음역 대비는 마치 천상과 지옥 같은 선연한 대조를 보여준다. 


알렉시오가 악마의 유혹을 받는 부분 역시 당대 극음악이 묘사했던 영적 드라마같이 형상화된다. 사막 수도승이나 은수자의 악한 영과의 싸움, 심리적 고투가 로마라는 공간에 새롭게 이식된 셈이다. 1634년 판본에서는 이냐시오 데 로욜라 성인의 「영신수련」 중 ‘두 개의 깃발 묵상’을 연상시키는, 악마가 지옥 군대를 소집하는 대목도 구현된다.



시각 효과도 화제가 되었다. 천사가 무대 위로 날아올라 악마를 물리치는 장면, 건물 외관이 사라지며 계단 아래 드러나는 알렉시오의 시신, 천사들 가운데 있는 마지막 모습은 극적이고 화려하게 연출되었다. 이는 바로크 회화들이 거대한 극장에 재현된 듯한 장려(壯麗)한 시각적 환영을 자아냈다.


문득 로마 나보나광장에서 보았던 성녀 아녜스 성당(SantAgnese in Agone)의 성 알렉시오 부조가 스쳐 간다. 그는 말 그대로 빈사의 상태로 누워있다. 자기 집 계단 아래 17년간 살았던 성인과 그를 알아보지 못했던 가족. 이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보지 못하는 눈먼 우리네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글 _ 박찬이 율리아나(음악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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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5-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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