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요셉은 친숙하나, ‘요셉학(Josephology)’은 낯설다. 성 요셉에 관한 신학 연구를 가리키는 이 용어는 그리스도론(Christology)과 마리아론(Mariology)의 하위 범주에 자리한다. 논리는 간명하다. 요셉을 아는 일은 마리아를 비추는 길이고, 마리아를 이해하는 것은 그리스도 강생의 신비에 다가서는 일이다.
요셉학은 성 토마스 아퀴나스 등 중세 신학에 뿌리를 두지만, 본격적 토대를 갖춘 것은 19세기부터 이어온 교황 문헌 덕분이었다. 1870년 비오 9세 교황은 성 요셉을 ‘보편 교회의 수호자’로 명명했고, 레오 13세 교황은 1889년 회칙 「쾀쾀 플루리에스(Quamquam Pluries)」를 통해 요셉 신심을 권면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20~2021년을 ‘성 요셉의 해’로 선포하고, 교서 「아버지의 마음으로(Patris Corde)」를 발표해, 요셉 성인이 갖는 현대적 의미를 새롭게 조명한 바 있다.
요셉 연구자 필리페토(Joshua Francis Filipetto)는 요셉학이 마주한 세 가지 구조적 한계를 지적한다. 교부적 근거의 희박함, 명시적 교의 선언의 부재, 과도한 신심이 초래하는 일탈 위험이다. 그는 성 아우구스티노, 성 예로니모, 성 에프렘 정도를 제외하면 교부 문헌에서 성 요셉은 거의 침묵 속에 머문다고 지적한다. 또한 왜곡된 마리아 신심이 경계 대상이듯, 요셉 공경도 비슷한 긴장을 피할 수 없다고 말한다. 요셉학의 역사는 150~200년 내외로 비교적 짧지만, 그 신학적 근거나 문화적 토양을 16~17세기 요셉 공경이 반영된 음악·미술·건축에서 풍부하게 찾아볼 수 있다는 점은 흥미롭다.
하인리히 비버(H. I. F. Biber, 1644~1704)의 〈성 요셉 호칭기도(Litaniae de Sancto Josepho)〉는 그 대표 사례다. 작품은 당시 비버가 활동하던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서 큰 영향력을 가졌던 성 요셉 형제회의 후원을 배경으로 한다.
주목할 것은 가사에 담긴 호칭들이다. “할례 때에 흘리신 예수님의 피를 받으신 분(Jesu sanguinem in circumcisione excipiens)” 대목을 보자. 예수님이 처음 피를 흘리신 할례는 수난과 십자가형의 예표였으며, 요셉의 협조로 인한 구원사적 의미를 강조한 것이다.
“인류 구원 사업의 지극히 충실한 협력자(in opere redemptionis humanae coadiutor fidelissime)” 구절은 이를 선명하게 요약한다.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의 봉사자이며 경탄할 만한 대리자(Sanctissimae Trinitatis minister et vicarie admirande)” 표현은 요셉을 삼위일체 구원 경륜(ο?κονομ?α)과 결부하는 대담함을 드러낸다. 그 과감한 어휘 선택은 당시 극치에 도달했던 요셉 신심을 보여준다.
음악적으로도 이는 비버 역량의 정점에 가깝다. 잘츠부르크 대성당의 공간 음향을 전제한 입체적인 다중 합창, 텍스트와 음악의 조화가 인상적이다. 한 성부가 다른 성부를 따라잡듯 모방하는 푸가(fuga) 형식은 ‘도망가다’ 어원과 관련이 있는데, 비버는 “어린 예수와 아내 마리아와 함께 이집트로 ‘피신하신(profuge)’ 분이여” 부분을 푸가 기법으로 묘사한다.
역사적 맥락은 더욱 선명하다. 합스부르크 왕가는 가톨릭 수호자로서의 정체성을 성인 공경과 연결했고, 성 요셉은 1654년 보헤미아 및 오스트리아 왕실의 공식 수호성인이 되었다. 〈성 요셉 호칭기도〉는 이러한 맥락을 반영하고 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정치 신학과 잘츠부르크 대주교후국의 전례 음악이 성 요셉에서 만나는 지점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아버지의 마음으로」에서 요셉을 일곱 가지 얼굴로 그린다. 가장 인상적인 정의는 역시 마지막이다. ‘그늘 속의 아버지.’ 그는 땅 위의 아버지로서, 하느님 아버지의 그림자다.
3월 19일 성 요셉 대축일을 맞아 생각한다. 우리에게 요셉 성인은 어떤 존재인가. 그는 가장 높은 역할을 맡았지만 가장 낮은 자리에 머문 인물이다. 비버 작품의 장엄한 신학적 수사가 전자를 드러낸다면, ‘그늘 속의 아버지’라는 조용한 정의는 후자를 비춘다. 성인을 간절히 부르는 비버의 음악을 들으며,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세상을 지탱하는 모든 ‘그늘의 아버지’를 떠올려본다.

글 _ 박찬이 율리아나(음악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