짙은 고동빛 나무가 굳건히 서 있다. 수평으로 벌어진 몸체와 곧게 내려선 중심축은 자연스럽게 십자가의 형상을 떠올리게 한다. 못 하나 없이 맞물린 나무 조각들은 흔들림이 없고, 톱과 끌이 지나간 자리마다 나무의 숨결이 살아 있다. 거대한 목조각에는 자연의 생명력과 함께 하느님을 향한 기도가 스며 있는 듯하다. ‘전기톱을 든 조각가’ 김윤신(잔느·91) 작가의 작품 <합이합일 분이분일 1994-520>이다.
한국 현대조각의 한 축을 이끌어 온 작가의 대규모 회고전이 경기 용인시 호암미술관에서 3월 17일 막을 올렸다. 전시 제목이자 대표 연작의 이름인 ‘합이합일 분이분일(合二合一 分二分一)’은 서로 다른 둘이 하나를 이루고, 다시 하나가 나뉘어 또 다른 하나를 이룬다는 뜻이다. 조각에 앞서 나무를 오랜 시간 바라보며 그 안에 잠든 형태를 끌어내는 작가의 통찰이자, 평생 붙들어 온 조형 세계의 핵심이다.
이번 전시는 작가의 국내 첫 대규모 회고전이자 호암미술관이 여는 최초의 여성 작가 개인전이다. 자연과 생명을 주제로 평생 작업해 온 그의 작품 1500여 점 가운데 조각과 평면 등 175점이 엄선돼 소개된다.
11일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나무는 곧 나”라며 “어렸을 때 시골에서 살며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을 배웠다”고 회고했다. 이어 “전쟁으로 쓰러지는 나무를 보며 오랜 친구가 쓰러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고, 그 감각이 지금까지 작품 안에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전시장 1층에는 <합이합일 분이분일 1994-520>을 비롯해 ‘합이합일’의 조형 언어가 자리 잡아 가던 시기의 연작들과 1970년대 제작된 <기원쌓기 시리즈>가 놓였다. <기원쌓기 시리즈>는 프랑스 파리 유학 시절 세례를 받은 이후의 체험이 반영된 작업으로, 하늘을 향해 양팔을 벌린 듯한 형상이 하느님을 향한 기도와 그 앞에 선 인간의 간절함을 떠올리게 한다.
이와 함께 젊은 시절의 추상 실험을 보여주는 석판화와 드로잉, 그리고 아르헨티나 이주 이후 남미의 육중한 나무를 통해 자연의 원초적 생명력을 밀도 있게 드러낸 작품들도 만날 수 있다.
2층에서는 남미의 화려한 색채를 반영한 나무 조각과, 작가의 또 다른 축을 이루는 돌조각이 이어진다. 전시장 외부에 설치된 <노래하는 나무 2013-16V1>(2025)는 조각과 회화의 경계를 허물며, 구순을 넘긴 지금도 확장되고 있는 작가의 예술세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전시를 기획한 태현선 큐레이터는 “작가는 자신이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길이 예술인 듯 작업해 왔다”며 “톱질과 망치질 자국으로 가득한 그의 조각은 오늘의 동시대 미술에서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작가’라는 존재를 실감하게 한다”고 말했다. 이어 “순수한 열정과 신념으로 평생 예술과 ‘하나 되어’ 살아온 한 예술가를 만나는 뜻깊은 시간이 될 것”이라고 전했다.
‘한국 1세대 여성 조각가’로 1935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난 김윤신 작가는 홍익대학교 조소과를 졸업하고, 1964년부터 1969년까지 프랑스 파리 국립미술학교에서 조각과 대리석 판화를 공부했다. 귀국 후에는 홍익대·상명대·성신여대 등에서 후학을 양성했고, 한국여류조각회 발족을 주도했다. 1984년 아르헨티나로 이주한 뒤에는 남미 원목을 바탕으로 작품 세계를 확장해 왔으며, 2008년 부에노스아이레스에 김윤신미술관을 개관했다. 2023년에는 그간의 예술적 성취를 인정받아 김세중조각상을 수상했다.
전시는 6월 28일까지, 입장료는 2만5000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