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4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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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속 예술, 예술 속 신앙] 〈애덕이 있는 곳에〉와 브뤼허 성 요한 병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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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 브뤼허 성 요한 병원(Sint-Janshospitaal) 박물관의 고요한 전시실. 한 유물 앞에서 헤드폰을 쓴 순간 그레고리오 성가가 흘러나왔다.


“애덕과 사랑이 있는 곳에, 하느님이 계신다(Ubi caritas et amor, Deus ibi est)”


〈애덕이 있는 곳에(Ubi Caritas)〉는 주님 만찬 성목요일 발 씻김 예식의 교송(안티폰)으로 오랫동안 사용됐다. 가사는 8세기 샤를마뉴 대제의 궁정에서 활동했던 카롤링거 르네상스의 핵심 인물인 아퀼레이아의 바울리노 성인이 쓴 것으로 전해진다. 애덕과 사랑이 있는 곳에 하느님이 현존하신다는 정의는 어떤 교리적 진술보다 명료하다. 지금 서 있는 장소의 정체성을, 성가는 단번에 관통하고 있었다.


12세기 중반에 설립된 성 요한 병원은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을 보존하고 있는 곳이다. 병자와 순례자, 여행자들을 돌보았고, 신분이나 출신에 상관없이 조력이 필요한 사람이라면 누구든 환영받았다. 〈애덕이 있는 곳에〉가 흙먼지 묻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재현하는 세족례, 주님 만찬 미사에서 불리듯, 이 시설은 환자들의 피고름과 토사물을 닦아내며 가장 낮은 곳으로 향했던 정신이 깃든 곳이다.


수녀들의 초상화 앞에서 발걸음이 멈췄다. 근대 이후 이곳은 아우구스티노 규칙서를 따르는 수녀회의 헌신으로 유지됐다. 이들의 사망률이 관 모양의 인포그래픽 형식으로 전시되어 있다.


1300년부터 1500년 사이, 이곳의 수녀와 간호하는 이들이 5년 이내 죽음에 이른 비율은 16퍼센트. 얼핏 작아 보이는 숫자다. 그러나 동일 조건으로 환산하면 10년 내 치사율은 약 30퍼센트, 15년 수치는 40퍼센트를 넘어선다. 도리어 환자들의 사망률은 낮게 유지됐다. 1782년부터 1796년까지 14년간 환자 생존율은 85퍼센트에 육박했다. 아픈 자보다 돌보는 자가 감염이나 과로로 먼저 쓰러진 것이다.



많은 종교가 희사나 자선을 강조한다. 그러나 재산을 내어주는 것과 생명을 내어주는 일은 다르다. 한 번의 순교가 아니라, 매일 병동에서 일하며 전염에 노출되고, 역병의 계절마다 쓰러져 가면서도 서원을 거두지 않는 삶. 이런 완전한 자기 봉헌, 애덕을 온몸으로 살아내는 전통은 그리스도교 안에서 특히 선명하고 눈물겹다.


성 요한 병원은 그래서 단순한 박물관이 아니다. ‘환대’의 원형이다. 병원(Hospital)과 환대(Hospitality)는 ‘손님 혹은 주인’을 뜻하는 같은 어근 ‘hospes’에서 왔다. 성 베네딕토가 수도 규칙서 53장에서 “찾아오는 모든 손님을 그리스도처럼 맞아들일 것이다”라고 했듯이, 이곳은 타인을 품어 안는 환대와 연민의 유산을 간직하고 있다. 전시장 곳곳의 〈착한 사마리아인〉, 〈아브라함의 환대〉를 그린 걸작들은 이 공간의 신념을 반복해서 증언한다.


이곳에는 또 다른 음악이 깃들어 있다. 죽어가는 이 곁에서 성사를 집전하고 기도하는 사제와 수녀의 모습, 그것은 호스피스의 원형이다. 다음 편에서는 〈하느님의 성인들이여 오소서(Subvenite, Sancti Dei)〉를 다룬다. 〈애덕이 있는 곳에〉가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자비의 노래라면, 이는 여정의 끝에서 망자를 성인과 천사들에게 의탁하는 찬가다. 두 음악 사이의 거리는 멀지 않다. 치유와 환대, 돌봄과 임종은 이 공간에서 완벽히 하나였기 때문이다. 〈(하)편에서 계속〉



글 _ 박찬이 율리아나(음악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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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6-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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