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0년 무렵, 대 바흐의 막내아들이 가톨릭으로 개종한다. 이름은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Johann Christian Bach·1735~1782). 이는 그저 전기적 사실처럼 보이지만, 바흐 가문에서는 일대 사건이었다.
바흐 일가는 루터교 신앙과 불가분인 음악가 집안이었고, 그 시초에는 파이트 바흐(Veit Bach)가 있다. 전승에 따르면 그는 루터교 신앙을 지키기 위해 고향을 떠나 튀링겐에 정착했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 떠난 사람. 음악을 누구보다 사랑한 분. 독일 최고의 음악 가문인 바흐 일족은 자신들의 선조를 그렇게 기억했다.
그런 가문의 막내가 다른 길을 택했다. 독일을 떠나 이탈리아로 갔고, 밀라노에서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 이복형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 바흐는 가계도 속 동생 이름 옆에 씁쓸한 문장 하나를 남겼다. “우리 가운데 이 사람만이 신실했던 파이트와 다르게 살았다.”
이탈리아에서 크리스티안은 마르티니 신부(Giovanni Battista Martini·1706~1784)를 만난다.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소속 마르티니 신부는 당대 유럽에서 손꼽히는 음악 이론가이자 교육자였고, 크리스티안은 그에게서 대위법과 작곡을 배웠다. 신학자 존 자나로(John Janaro)는 마르티니를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의 ’음악적·영적 아버지’라고 정의한다.
그렇지만 크리스티안의 개종에 마르티니 신부를 주요 배경으로 놓는 것은 지나친 해석이리라. 그의 결단에는 가톨릭 신자로서 얻을 수 있었던 현실적 고려가 큰 역할을 했다. 그는 개종 직후 1760년 밀라노 대성당의 오르가니스트가 된다. 그의 전환에는 교회음악가로서의 직책 획득, 이탈리아 음악계에서의 생존과 성공 욕구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이런 현실이 있다고 해서 사제지간의 의미가 퇴색되는 것은 아니다. 크리스티안에게 가톨릭 신앙은 음악으로 먼저 다가왔다. 마르티니 신부의 가르침을 통해 라틴 전례음악의 악보로, 대위법 훈련으로, 간절한 기도와 정연한 음악학은 서로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으로 왔을 것이다.
5월 성모 성월의 한복판, 그래서 그의 성모 찬송가 〈살베 레지나(Salve Regina)〉는 남다르게 들린다. 물론 루터교 전통이 마리아 관련 전례 텍스트들을 완전히 지운 것은 아니었다. 루카복음 1장 46~55절을 기반으로 한 마리아의 노래 〈마니피캇〉은 루터교 전례 안에서도 주요 축일마다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다.
아버지 바흐도, 이복형 에마누엘 바흐도 이 찬가로 빼어난 작품을 남겼다. 그러나 〈살베 레지나〉는 크리스티안이 ’자비의 어머니’, ’우리의 변호자’, ’예수님을 보이소서’ 같은 수사가 표방하는, 가톨릭 성모 신심의 정수까지 스며들었음을 보여준다.
그의 〈살베 레지나〉를 듣는 일은 한 작곡가의 변심을 확인하는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극적인 회심담으로 치환하는 것도 위험하다. 바흐 가문은 그를 ’신실했던 파이트와 다르게 산 사람’으로 기억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가 남긴 라틴 교회음악들은 깊은 신심과 모차르트조차 매료되었던 국제성과 유창함, 전아함을 보여준다.
그렇게 마르티니 신부 곁에서 대위법을 익히고, 라틴 교회음악을 손으로 더듬으며 배운 청년이 있었다. 스승은 음악가이자 신학자였고, 제자는 그 두 가지가 조화로이 통합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의 호소력 있는 〈살베 레지나〉와 마주한다는 것은, 루터교 바흐 가문의 막내가 어떻게 가톨릭 음악 언어를 배웠고, 그 일생일대의 전환이 어떤 자취로 남았는지 엿보는 일이기도 하다.
글 _ 박찬이 율리아나(음악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