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6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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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불 수교 전 이미 가톨릭 통한 친교가 있었다

한불 수교 140주년 ‘선물과 기록’ 전, 국립고궁박물관 8월 2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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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과 기록, 한국-프랑스 우정의 140년’ 전 전경.

 

박해·순교 기록부터 「한불자전」·조불조약 원문까지 한자리에

명동대성당 대지 매입 일지·병인양요 관련 기사도 볼 수 있어



우리나라와 프랑스가 나눈 친교의 역사를 확인할 수 있는 전시회가 서울 종로구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다. 바로 ‘선물과 기록, 한국-프랑스 우정의 140년’ 전. 두 나라가 각각 보관해 온 1886년 ‘조불수호통상조약(朝佛修好通商條約)’ 관련 문서들을 비롯해 역대 지도자들이 주고받은 선물과 서신 등을 통해 우정의 역사를 종합적으로 살펴보는 전시다.

그러나 조선과 프랑스의 교류는 1886년 정식 수교에 앞서 가톨릭을 통해 깊고 은밀하게 뿌리내렸다. 조선 교회는 18세기 후반 성직자 없이 자생적으로 형성된 신앙 공동체로 출발했지만, 1831년 교황청이 조선을 북경교구에서 분리해 ‘조선대목구’로 지정하며 성장한다. 당시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이 파리외방전교회에 조선의 선교를 맡기며 프랑스인 선교사들의 조선 입국과 포교 활동이 본격화된다. 1837년 비밀리에 입국한 성 앵베르 주교는 성 모방·샤스탕 신부 등과 함께 조선 교회의 체계를 조직적으로 정비했다. 그러나 조선의 유교적 질서와 충돌하면서 1839년 기해박해 때 이들 사제는 모두 순교했다. 그럼에도 프랑스 선교사들의 입국 시도는 멈추지 않았고, 신자들을 위해 교리서를 펴내고 신학교를 세우는 등 교회의 기틀을 닦았다.

 

「한국천주교회사」(1874,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이번 전시에서는 정식 수교에 훨씬 앞서 가톨릭을 통해 이뤄진 두 나라의 특별한 관계도 여러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한국교회사연구소를 비롯해 국내외 주요 기관에 소장된 자료들이다.

먼저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샤를 달레 신부가 「다블뤼 주교 비망기」를 참고해 프랑스어로 저술한 「한국천주교회사」(1874)가 전시돼 있다. 조선에 가톨릭이 녹아든 과정부터 흥선대원군 집권 시기까지의 박해 등 한국 천주교회의 전개 과정을 서술하고 있다.

고종 즉위 후 1866년에는 흥선대원군의 주도로 천주교에 대한 대대적 탄압(병인박해)이 이뤄지면서 성 베르뇌 주교를 비롯한 프랑스 선교사들과 수많은 조선인 신자가 희생됐다. 이에 프랑스군이 강화도에 함대를 이끌고 침략한 병인양요가 발생했다.

 

 

프랑스 주간지에 실린 병인양요 관련 기사(1867).

 


병인양요 때 한강 양화진을 지킨 총융진 소속 군사들의 명단이 새겨진 현판(1866), 당시 프랑스 주간지에 실린 병인양요 관련 기사(1867) 등도 현장에서 확인할 수 있다.

8년간 이어진 탄압에도 조선 천주교회는 1876년 블랑 신부와 드게트 신부의 입국으로 재건의 기회를 맞는다. 1877년 다시 조선에 들어왔다가 체포돼 중국으로 추방된 리델 주교는 동료 선교사들과 함께 준비하던 한불사전 및 한국어 문법서의 마무리 작업에 몰두했다. 그 결실로 1880년과 이듬해 각각 「한불자전(Dictionnaire Coréen-Français)」과 「한어문전」을 펴냈다. 19세기 국어의 모습을 간직한 이들 자료도 전시돼 있다.

 

 

최초의 한국어-외국어 사전 「한불자전」(1880, 서울역사박물관) 및 한국어 문법서 「한어문전」(1881, 김해한글박물관).

 


국립고궁박물관 이홍주 학예연구사는 “「한불자전」은 금속 활자를 이용한 최초의 근대적 한국어-외국어 사전이며, 첫 프랑스어판 한국어 문법서인 「한어문전」에는 한국어 문장 번역을 위한 단계별 연습이 함께 수록돼 있다”고 설명했다.

이런 가운데 1882년 조선과 미국의 수교가 성사됐으나 프랑스와의 수교는 여전히 쉽지 않았다. 가톨릭 전교의 자유를 보장받으려는 프랑스와 약 100년간 천주교 금지 정책을 유지한 조선 정부의 입장이 달랐기 때문이다. 1886년에야 두 나라 간 공식적인 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된 이유다. ‘조불수호통상조약''은 우리나라가 서구의 여타 열강과 맺은 조약과 달리 수교 협상의 최대 쟁점이었던 ‘선교 활동의 보장’ 문제가 수록돼 있다.

 

 

조불수호통상조약(朝佛修好通商條約) 문서(1886, 한국 국립중앙도서관-좌, 프랑스 외교사료관-우).

 


이 학예연구사는 “프랑스가 요구한 ‘포교(布敎)’ 대신 ‘교회(敎誨)’, 즉 ‘가르치고 훈계한다’는 표현을 조약문에 삽입해 전교를 암묵적으로 허용했고, 조선 정부가 발행한 여권인 ‘호조(護照)’를 소지한 프랑스인에게 조선 전역의 여행을 허용함으로써 프랑스 선교사들의 안전을 간접적으로 보장했다”고 말했다.

우회적 표현을 통해 조선 정부가 가톨릭을 수용했음을 시사한다. 이를 통해 프랑스 선교사들은 그간 눈에 띄는 외모를 가리기 위해 입어야 했던 상복을 벗을 수 있었다. 전시에서는 1886년 6월 4일 조선과 프랑스가 교환한 ‘조불수호통상조약(朝佛修好通商條約)’ 관련 문서를 확인할 수 있다. 각각 국립중앙도서관과 프랑스 외교사료관이 소장하고 있는 자료다. ‘대조선국’ 연호가 쓰인 여권 양식과 부이수 신부의 여행권(1895)도 전시돼 있다.

한불 수교를 통해 프랑스 선교사들의 전교 활동은 이전보다 자유로워졌고, 가톨릭 역시 조선 사회에 광범위하게 확산됐다. 서울대교구 중림동 약현성당과 주교좌 명동대성당이 건립된 것도 이 시기다.

 

 

명동대성당 건축을 위한 대지 매입 일지(1889, 한국교회사연구소).

 


제7대 조선대목구장이 된 블랑 주교는 조선의 첫 평신도 순교자인 김범우(토마스) 생가 옆 당시 종현 언덕 부지를 사들이면서 지금의 명동대성당 건립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블랑 주교가 1883년부터 1889년까지 부지 매입 과정을 기록한 ‘명동성당 건축을 위한 대지 매입 일지(1889)’도 확인할 수 있다.

명동대성당 터는 조선 왕조 역대 왕들의 어진을 모신 영희전을 내려다보는 위치라는 이유로 조선 정부의 강한 반대에 부딪혀 공사가 지연되기도 했다. 그러나 신자들은 자발적으로 터를 평탄하게 정비하는 작업에 참여했다. 코스트 신부의 설계와 감독 아래 1892년 5월 기공식, 그의 사후인 1898년 5월 축복식을 거행했다.

명동대성당의 모습이 담긴 사진 엽서(20세기)도 전시돼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고딕 양식 건축물인 명동대성당은 당시 남산이나 조선총독부 건물 등과 함께 서울을 상징하는 주요 건축물로 인식돼 많은 사진 엽서의 소재가 됐다.

이번 전시는 매월 마지막 주 월요일을 제외하고 8월 2일까지 매일 오전 9시 30분부터 오후 5시 30분까지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오전 11시와 오후 3시 전시 해설(도슨트) 서비스도 운영된다. 이후 8월 14일부터 한 달간 세종시 대통령기록관에서 이어진다.

윤하정 기자 monica@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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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6-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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