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마의 산타 마리아 소프라 미네르바 성당에서 성 시에나의 카타리나 유해를 마주했을 때였다. 문득 한 가지 사실이 떠올랐다. 이곳에는 몸이 있지만, 성녀의 머리를 보려면 시에나로 가야 한다. 두상이 시에나의 산 도메니코 대성당에 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몸이 로마와 시에나, 두 도시 사이로 나뉜 셈이다.
사학자 피터 브라운은 성인 공경이 무덤을 찾아가는 순례를 넘어, 성인의 유해가 여럿으로 분리되어 사람들 사이로 옮겨지는 일이었다고 말한다. 성해는 도시와 도시 사이를 이동했고, 이는 새로운 신앙의 지형도를 만들며 공동체의 신심을 고취했다. 그는 성인 유해의 광범위한 이동이 중세 그리스도인의 사고에서 큰 위치를 차지하지 않았다면, 성인 공경이 이처럼 결정적으로 확대되지 못했으리라고 추측하였다.
그렇다면 성해는 어떻게 성스러운 표지가 되었을까. 성 다마스쿠스의 요한은 8세기 비잔티움의 성상 파괴 논쟁이 한창이던 때, 성화상을 옹호하며 다음과 같이 논박했다. 하느님께서는 스스로를 비우고 ‘육신’을 취하시어 강생하셨기에, 그분의 형상은 그려질 수 있다. 우리는 성상과 성화를 통해 그림이나 물질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가리키는 원형을 공경한다. 성해 역시 성인과 그들의 그리스도 안에서의 일치를 기억하게 하는 물질적 매개로 존중받는다.
베네딕토 16세 교황께서 지적하셨듯이, 요한은 오직 하느님께 드리는 ‘경배’와 성인에게 드리는 ‘공경’을 구분한 대표적 인물이기도 하다.(2009년 5월 6일 일반알현 중) “경배(λατρεία)와 비상한 탁월함을 지닌 대상에게 바치는 공경(προσκύνησις)은 서로 다른 것이다.”(「성화상에 대한 세 편의 변론」, I.8)
이 논리는 성화상에만 머물지 않았고 성해로 확장되었다. 성인의 육체 일부는 그들이 그리스도를 따르고 본받았던 삶을 기억하게 하는 물질적 표지가 되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도 이 전통을 명시한다. “교회는 전통에 따라 성인들을 공경하고, 그들의 진정한 유해와 성화상도 존중한다.”(「전례헌장」 111항)
성해 공경은 성인이 하느님 안에서 완성된 시간을 기억하는 일이기도 했다. 순교자 축일이 대개 선종한 날에 기념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초대교회는 순교자가 죽음을 통과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에 들어간 날을 ‘천상 탄일(dies natalis)’로 기억했다. 죽음은 삶의 끝을 넘어, 그리스도를 따라 피 흘린 이가 하늘에서 새롭게 탄생하는 날로 인식되었다.
이러한 기억은 성음악 안에서도 울린다. 스페인 르네상스 작곡가 빅토리아(Tomás Luis de Victoria, 1548~1611)는 1585년 간행한 모테트집에 〈성인들의 영혼은 하늘에서 기뻐하네〉를 수록했다. 작품은 순교자를 공통으로 기리는 성무일도에서 부르는 안티폰을 네 성부로 확장한다.

“성인들의 영혼은 하늘에서 기뻐하네(Gaudent in caelis animae sanctorum). 그들은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랐고(qui Christi vestigia sunt secuti), 그분을 사랑하여 자신의 피를 흘렸기에(et quia pro eius amore sanguinem suum fuderunt), 그리스도와 함께 끝없이 기뻐하네(ideo cum Christo exsultant sine fine).”
빅토리아의 음악은 순교자들의 피를 강조하며, ‘흘렸다(fuderunt)’ 가사에는 하행 선율을 붙여 마치 흐르는 피를 보는 것 같은 효과를 자아낸다. 한 성부가 선율을 건네면 다른 성부가 받아서 이어가는데, 이는 한 사람의 기억이 다른 이의 목소리 안에서 확장되고 마침내 공동체의 찬미가 되는 흐름을 연상시킨다.
빅토리아의 다성음악에서 순교자들은 천상에서 환희에 찬 모습으로 형상화된다. 그들의 몸 역시 무덤에만 있지 않았다. 성해로, 민중 신심과 성가로 전파되며 더 많은 이의 기억 속에 자리 잡았다.

글 _ 박찬이 율리아나(음악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