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미술 500년’ 전 전경. (왼쪽부터) △누녜스의 ‘성녀 체칠리아’ △카레뇨의 ‘원죄 없이 잉태된 성모’ △무리요의 ‘돼지들 사이의 탕자’ △수르바란의 ‘성녀 루치아’ △카스티요의 ‘목자들의 경배’.
한국-스페인 수교 76주년을 기념한 특별전 ‘스페인 미술 500년: 빛과 어둠의 연대기’가 서울 예술의전당 한가람디자인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미국 히스패닉 소사이어티 박물관&도서관 컬렉션의 아시아 최초 전시로, 중세부터 20세기까지 스페인 미술 500년의 흐름을 보여준다.
스페인은 지중해 무역로, 십자군 전쟁 및 이슬람 제국의 확장 등을 통해 유입된 비잔틴·이슬람 문화, 여기에 그리스도교 전통이 어우러지며 여느 서유럽 국가와는 차별화된 예술 세계를 구축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이러한 역사·문화 흐름이 회화에서 어떻게 구현됐는지 조명한다. 엘 그레코, 디에고 벨라스케스, 프란시스코 고야 등 스페인 미술사를 대표하는 거장들의 원화 95점을 선보이고 있다.
전시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총 6개의 섹션으로 나뉜다. 중세의 종교화와 르네상스를 시작으로 스페인 미술의 황금기라 불리는 바로크 회화, 고야와 낭만주의 회화, 풍경과 빛을 담아낸 외광회화, 스페인의 일상과 문화적 정체성을 담은 풍속화, 전통과 근대의 특징이 공존하는 모더니즘 회화다.
앞부분에서는 국내에서 접하기 힘든 다량의 스페인 종교화를 확인할 수 있다. 16세기 중반 스페인 미술 역시 르네상스 시대로 접어든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은 여전히 스페인 미술의 중심축이었고, 교권을 시각화하는 종교화의 오랜 전통을 풍성하게 꽃피웠다. 르네상스가 비교적 늦게 도래한 스페인에서는 전성기 르네상스보다는 매너리즘에 가까운 양식이 뿌리내린다. 매너리즘 양식은 완벽한 조화와 균형을 추구했던 르네상스 거장들의 기법을 모방하면서도 인체의 과장과 왜곡, 비사실적인 색채, 파격적인 구도를 시도한다. 길게 늘어진 유려한 인체 표현과 환상적인 색채, 소용돌이치는 붓질 등이 특징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성모님과 성가정을 담은 작품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엘 그레코 작 ‘성가정’, 1585.
그리스 출신의 대표적인 스페인 종교화가 엘 그레코의 ‘성가정’(1585)은 그의 명성과 성공이 절정에 달한 시기에 제작됐다. 아기 예수님에게 젖을 먹이는 성모님과 이를 바라보는 성 요셉의 모습을 통해 엄숙한 신성에 짙은 인간미를 불어넣음과 동시에 보는 이로 하여금 친밀감을 느끼게 한다. 성모님이 쓴 투명한 레이스 만티야에 특히 공을 들여 대담한 붓놀림을 펼쳐보였다. 반종교개혁 화가인 그레코는 자신의 깊은 신앙심과 파격적인 표현력을 결합해 평생 종교적인 주제에 전념했다.
루이스 데 모랄레스 작 ‘예수 그리스도의 천궁도가 있는 성가정’, 1554~1560.
‘신이 보낸 자’라는 수식어를 지닌 루이스 데 모랄레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천궁도가 있는 성가정’(1554~1560)을 그렸다. 플랑드르 회화의 세밀한 묘사와 이탈리아의 밝은 색채 위에 윤곽선을 흐리게 그리는 다빈치의 ‘스푸마토 기법’이 눈에 띈다. 오른쪽 상단에 당시 이슬람 문화의 유입으로 유행했던 천궁도(탄생 별자리 배치도)를 더했다.
이밖에 마리아의 원죄 없는 잉태와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예수님의 잉태를 알리는 장면도 스페인 특유의 화풍으로 감상할 수 있다.
후안 데 발데스 레알 작 ‘십자가를 짊어진 예수님(십자가의 길)’, 1661.
미겔 알카니스 1세와 조수들이 함께 작업한 ‘예수의 승천’(1422~1430)은 15세기 초 고딕 양식이 돋보인다. 이 그림은 제단화의 중앙 패널로, 예루살렘 성 요한 기사단 교회 측면 제단을 위해 봉헌됐다. 화려하고 환한 색감과 사실적 표현, 물결치는 천의 곡선 표현이 두드러진다. 반면 2세기 뒤에 그려진 후안 데 발데스 레알의 ‘십자가를 짊어진 예수님(십자가의 길)’(1661)은 대각선 구도의 강렬한 원근법이 인상적이다. 수난을 상징하는 자주색 옷, 체념과 피로가 뒤섞인 표정, 땅에 쓰러지지 않기 위해 오른손을 왼쪽 무릎에 얹은 모습이 정교하고 사실적이다.
여러 성인의 모습도 걸려 있다. 익숙한 히에로니무스·안토니오 성인 외에 루치아·체칠리아 성녀의 모습이 눈에 띈다.
프란시스코 데 수르바란 작 ‘성녀 루치아’, 1630.
프란시스코 데 수르바란의 ‘성녀 루치아’(1630)는 부유한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동정을 서원한 뒤 가난한 이들에게 재산을 나눠준 성인의 모습을 담았다. 자신의 소유가 될 재산이 사라진 것에 분노한 이교도 구혼자가 로마 제국에 고발해 성인은 순교했다. 이 과정에서 두 눈알이 뽑히기도 했다. 작가는 그러나 단정하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여인의 정연한 모습을 통해 천국에서의 영광을 암시한다.
페드로 누녜스 델 바예 작 ‘성녀 체칠리아’, 1638~1658.
페드로 누녜스 델 바예는 음악의 수호성인인 ‘성녀 체칠리아’(1638~1658)를 그렸다.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고 동정을 서원한 성인과 함께 이교도 남편도 그 뜻을 따랐으나, 그 신앙은 결국 순교로 이어졌다. 작가는 화려한 옷을 입고 금빛 오르간 앞에 앉은 성인의 모습을 통해 하늘이 내린 보상을 드러낸다. 1599년 로마에서 체칠리아 성인의 유해가 부패하지 않은 상태로 발굴되면서 많은 화가가 화폭에 담았다.
한편 이번 전시에서는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에 비해 캔버스에 잘 담기지 않았던 마태오 사도와 루카 복음사가의 모습도 확인할 수 있다.
호아킨 미르 트린셋 작 ‘타라고나 대성당의 채광탑’, 1928
호세 마리아 로페스 메스키타 작 ‘아빌라의 신학생들’, 1952.
라이문도 데 마드라소의 ‘세비야 알카사르 경당에서의 기억’(1868), 호아킨 미르 트린셋의 ‘타라고나 대성당의 채광탑’(1928), 호세 마리아 로페스 메스키타의 ‘아빌라의 신학생들’(1952) 등 후대 풍경화에 자연스레 담긴 신앙 유산도 인상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