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직자, 교리교사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는 가롤로 보로메오 성인은 이탈리아 아로나 성의 지베르토 백작과 비오 4세 교황의 여동생인 마르게리타 사이에서 태어난 차남입니다. 어릴 때부터 교회에서 봉사하고자 하는 열망이 커 12세 때는 산 그라시니아노 수도원에서 삭발례를 받았습니다. 그 후에는 밀라노로 가 알치아티로부터 교육을 받았고, 1552년 파비아대학교에 진학해 민법과 교회법 박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비오 4세 교황은 1559년 교황직을 계승하고 나서, 평소 눈여겨본 조카를 로마로 불러들였습니다. 22세의 나이에 파격적으로 추기경에 임명된 겁니다. 성인은 1562년 형이 세상을 떠나는 슬픔을 겪고 나서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을 수 있는 보로메오 가문의 수장 직책을 거절하고, 1563년 사제품을 받았습니다. 그는 「본당 신부들을 위한 로마 교리서」 편찬에 깊이 관여하는 한편, 미사 경본·성무일도·교회 음악의 개정과 개혁, 교부들의 저서 출판 등에 헌신하였습니다. 특히 그는 가톨릭교회의 공식 교리서가 출판돼야 한다는 트리엔트 공의회 결정에 따라 ‘교리서 편찬을 위한 위원회’의 위원장으로 임명되어 막중한 소임을 성공적으로 마쳤습니다. 1566년 비오 4세 교황을 계승해 선출된 성 비오 5세 교황은 해당 교리서의 출간을 명했고, 「로마 교리서」를 발행하면서 성인의 노력을 치하했습니다.
성인이 밀라노교구장일 때는 주로 설교 활동에 종사하면서 프로테스탄티즘의 침입을 저지하고 타락한 신자들을 다시 교회로 불러들이는 데 힘을 기울였습니다. 이 시기 성인이 전개한 사목은 가톨릭교회에 크나큰 영향을 미쳤는데, 그중 교구의 행정 체계를 재조직하고 관구 공의회와 교구 공의회를 여러 차례 소집한 것, 교구 내 모든 곳에 사목 방문을 정례화한 것, 신학교를 개설한 것, 그리스도교 교리 신심회를 조직한 것은 뛰어난 공적으로 꼽힙니다. 1576년 페스트와 기근으로 밀라노 인근 주민들이 큰 고난을 겪게 되자 한 달 동안 매일 3000여 명의 주민에게 음식물을 제공하는 등 어려운 이에 대한 구호 활동과 관련 단체 설립에도 전력을 다했습니다.
강도 높은 개혁을 단행한 성인은 1567년 주교 관할권에 대한 밀라노 의회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히기도 했습니다. 나쁜 생활에 물든 평신도 여러 명을 투옥했기 때문입니다. 성인은 심한 공격을 퍼붓는 시 당국 관계자를 모두 단죄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성인은 반대자들이 보낸 자객의 총에 맞기도 했지만, 다행히 총알이 몸을 스치고 가 크게 다치지는 않았습니다. 이후에도 교회와 시의회 사이의 관할권 분쟁은 계속되었으나 성인은 그때마다 지혜롭게 대처했습니다.
성인은 1584년 고열을 앓다 어느 날 밤에 “주님, 저를 여기 대령합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선종했습니다. 시복은 1602년 5월 12일 클레멘스 8세 교황에 의해, 시성은 1610년 11월 1일 바오로 5세 교황에 의하여 됐습니다. 성인의 유해는 밀라노 주교좌성당 중앙 제대 아래 묻혔습니다. 성인은 가톨릭 개혁 운동의 기수 가운데 한 사람이자 학문과 예술의 수호자였습니다.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위치에 있었지만, 항상 겸손하게 처신하고 성덕을 높임으로써 개혁의 반대자들에게도 칭송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