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요한 사도에게 마음이 쏠려 지냅니다. ‘생전 처음’ 요한복음이 예수님의 제자 요한이 기록한 믿음인의 회고록처럼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일에 평생을 바친 노인, 요한 사도가 젊은 날 예수님과 지낸 일들을 추억하며 기쁘고 아프고 놀랍고 또한 쓰라렸던 순간에 담겼던 의미를 다시, 또한 새삼 깨달으며 적어내린 고백록이라 싶은 겁니다. 때문에 사건과 상황기록에 집중했던 타 복음서와 다른 것이라 싶은 것입니다. 평생 주님의 사랑을 닮아 살며 복음을 전했던 그가 세상을 하직할 날을 예감하며 주님의 가르침을 최종 정리하여 전하려 했던 것이라 싶어 한 문장도 소홀히 읽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야말로 동료 제자들이 모두 순교를 당하는 중에 홀로 천수를 누리게 하신 주님의 뜻이라 생각했을까요? 밀려드는 감회는 또 얼마나 진했을까요? 젊은 시절에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많은 의미를 주님의 행적을 추억하며 새로이 새기며 수없이 “이제서야 깨닫습니다”라고 고백했던 기록이기에 복음의 엑기스를 듬뿍 담을 수 있었을 것이라 여겨져, 감동할 뿐입니다.
특별히 주님께 사랑받았던 날들, 그러기에 온 삶에 자리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돌아보며 차올랐을 감회를 탐하며 제발 저에게도 나이를 더할수록 더 더 더 주님을 사랑하며 글을 적을 수 있는 지혜를 청해봅니다. 그리고 이 글을 볕 좋은 교정에서 도란도란 예수님 이야기를 나누는 심정으로 적습니다. 부디 찬란한 봄 햇살처럼 포근한 마음으로 읽어 주시길….
에페소에서 기록된 것으로 알려진 요한복음은 나이가 아흔에 접어든 노년의 기록으로 추측됩니다. 이를테면 젊은 시절에는 미처 몰랐던, 성숙한 삶을 살아낸 인간에게만 선물 되는 하느님의 속뜻이 담긴 까닭에 깊고 높은 진리로 그득한 것이라 싶습니다. 요한복음에서만 만나는 말씀들이 유난히 사랑스러운 이유겠지요.
오늘 요한 사도는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라는 예수님의 선언을 들려줍니다. 물론 모든 그리스도인은 주님과 하나 되는 삶을 추구합니다. 그럼에도 하느님의 존재와 섭리를 의심하는 경우가 더러 생깁니다. 신실한 믿음인도 허다한 시련 속에서 의기소침해지는 어둠의 시간을 피하지 못합니다. 오직 주님의 사랑만 강조했던 요한 사도에게도 벅찬 난제들이 수두룩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악조건을 주님을 사랑해드리는 마음으로 헤쳐 나갔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처지에서도 그분의 위대하심과 고귀한 사랑을 전하는 존재임을 새겨 살았던 덕분일 것입니다.
그러기에 교회는 언제나 주님의 부활을 기억하는 기쁨과 감사함을 넘어, 십자가에서 고통당하신 예수님을 기억합니다. 하느님을 너무나 잘 믿었지만, 하느님의 아들을 배척했던 바리사이들의 어긋남을 거듭 살핍니다. 바리사이들은 어느 누구보다 더 올바른 믿음을 살고자 했지만 그 마음 바탕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세속적인 복에 집중했기에 복음마저 율법 안에 가두는 우를 범했습니다. 결국 스스로 율법에 갇혀 이웃의 자유마저 박탈했습니다. 판단의 감옥에 갇혀 열등한 세상의 것에 종노릇을 하고 말았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통해서 진리를 깨닫고 완전히 변화했던 제자들과 다를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이유이지요.
진리이신 예수님의 가르침은 변화된 삶으로 증거될 때, 힘이 있습니다. 거짓과 위선과 이기심을 벗을 때에만 복음의 산증인으로 우뚝 설 수 있습니다. 이제 부활하신 주님을 향한 경외심으로 세상의 모든 사물을 바라봅시다. ‘내 기준’에 묶여서 좁고 옹졸했던 마음에 자유를 선물합시다. 무엇보다 모든 피조물의 대표임을 깊이 새겨, 주님께 경배 드리는 마음으로 존귀한 삶을 살아갑시다. 주님의 뜻에 일치하여 세상을 감동시키는 복된 삶의 주역이 돼 봅시다.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을 복음서를 통해서 만납니다. 주님의 말씀인 복음에 새겨진 예수님의 마음을 잉태하여 일상 안에서 모든 사건을 예수님의 행적을 닮아 살아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겪으신 모든 사건 속에 감춰진 하느님의 뜻과 은혜의 신비를 체험하는 지혜를 누려야 합니다.
성소 주일인 오늘도 주님께서는 아픈 세상을 위해서 아버지께 절절히 간구하십니다. 그리고 당신 사랑을 느끼지 못하여 마음이 꺾인 이들에게 우리를 파견하십니다. 당신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 참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이웃에게 당신의 사랑을 전하라 하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그분께서 서둘러 찾아 나선 양은 바로 당신의 일은 뒷전으로 미루고 교회 주변에만 머물러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이라 생각해봅니다. 걸핏하면 세상에 한눈을 파느라 길을 잃고 헤매기 일쑤인 그 양이 바로 복음 선교를 미루고 사랑을 계산하는 ‘나’임을 느끼게 되어 속 아픕니다.
삶은 누구에게나 처음입니다. 때문에 언제나 새롭고 신박하여 늘 낯선, 날 것일 수 있습니다. 따져보면 우리의 오늘은 밀려 사라지는 찰나의 연속입니다. 이렇듯 삶이란 순간에 적응하는 과정에 불과할지 모릅니다. 그렇기에 지금이 소중합니다. 이제는 부활하셨지만 오늘도 세상 구원을 위해서 고통당하시는 예수님을 응원해드리는 마음으로 채워 살면 좋겠습니다. 삶을 성찰하며 순간순간을 복음으로 채워 지내면 좋겠습니다. 영원하시며 헤아릴 수 없는 주님의 계획에 찬미드리는 마음을 놓치지 않는다면, 우리도 요한 사도처럼 부활하신 구세주 예수님께 큰 사랑을 받으리라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힘으로 오롯이 아름다운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가시길, 축원합니다.
장재봉 스테파노 신부
부산가톨릭대학교 신학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