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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묵상] 연중 제26주일- 오늘 생각을 바꾼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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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기만

남을 속이려면 자신부터 속이라고 합니다. 확신에 찬 목소리와 또렷한 시선, 선명한 주장과 구호들은 남을 설득하는 도구이기 이전에 자신의 참모습을 가리는 기만의 마스크가 됩니다. 하느님 앞에 오롯이 진실한 마음으로 서는 것은 “두렵고 떨리는”(필리 2,12) 일이니만큼, 인간은 갖가지 자기 기만과 합리화로 진실을 피해갑니다. 자기가 속한 집단의 정체성을 나의 정체성으로 여긴다든가, 거대한 명분의 그림자 뒤에 숨는다든가, 남 탓이나 남의 흉 들추기에 시선을 집중하면서 자비와 용서를 필요로 하는 자신을 외면하는 일들이 그렇습니다.

남을 지적하는 내 목소리가 커질수록 내 귓가에서 들리는 양심의 소리는 작아집니다. 세상이 썩었다며 개탄만 하는 사람보다 죄와 죽음이 오염시킨 세상에 책임감을 느끼며 자신부터 하느님의 의를 추구하는 사람이 많았다면, 현실은 뭔가 달라도 달랐을 것입니다.

영원한 죄인도, 영원한 의인도 없다

오늘 첫째 독서에서 에제키엘 예언자는 주님의 길이 공평하지 않다고 투덜거리는 이들에게 일갈합니다. 그들은 혼탁한 세상을 탓하며 정의가 무너졌다고 아우성쳤습니다. 에제키엘이 살던 시대는 유다왕국이 멸망하고 예루살렘이 함락되며 바빌론으로 유배되는 비극적인 때였지요. 그렇게 망국의 내리막길을 걷는 와중에도 자신은 의인, 타인은 악인이라 여기며 자신이 지목한 악인을 처단하는 것만이 정의의 실현인양 모두를 기만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만 바뀌면’, 다시 말해 ‘나를 제외한 다른 이들만 변하면’ 상황이 좋아진다는 주장은 자기 자신부터 속이는 것입니다.

오히려 인간의 현실은 영원한 의인도, 영원한 악인도 없다고 일러줍니다. 역사 속에 씻을 수 없는 오명을 남겼던 악인들도 한때는 빛나는 청춘이요 순수의 화신이었습니다. 시궁창에서 자라난 연꽃처럼 어두운 과거를 뒤로 하고 보람 있는 삶을 산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러니 과거의 관성에 떠밀려가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내 생각, 내 궤적을 고수하는 대신, 매 순간 하느님의 의에 맞추어 결단하고 실천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런 면에서 에제키엘 예언자는 기존의 제도와 규칙들이 속절없이 무너지고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야 하는 격변의 시대에, 기초부터 다시 집을 짓는 마음으로 하느님의 의를 향해 삶의 방향을 돌리라고 촉구합니다.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해라

이어서 예수께서 말씀해주신 오늘 복음의 비유는 아버지 하느님께서 “얘야, 너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하여라”(마태 21,28)라고 명하시는 장면에서 출발합니다. “얘야”는 그리스어 ‘테크논’(Τ?κνον)을 번역한 것입니다. 아들의 법적 상속권을 강조하는 ‘휘오스’ 대신에 아버지와 아들의 친밀한 관계가 부각되는 테크논이라는 단어를 쓴 것은 하느님의 포도밭에서 일하는 것이 아버지의 사랑에 참여하는 것임을 또렷이 드러냅니다.

아버지의 포도원을 돌보는 일, 즉 사랑으로 모든 생명을 돌보시는 아버지의 일에 참여하는 것은 미뤄두거나 떠넘길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오늘 일하라’는 아버지의 말씀을 전하시지요. 아들들이 나름의 계획이나 일정이 있더라도 사랑을 실천하는 일보다 앞세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두 아들

아버지의 이런 부탁에 두 아들은 대조적인 태도를 보입니다. 맏아들은 처음에는 싫다고 했지만 결국에는 아버지의 뜻을 따릅니다. 반면 다른 아들은 말만 흔쾌히 하고 포도밭에 가지 않습니다. 비유 속의 맏아들과 또 다른 아들이 직접적으로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분명합니다. 맏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실천”(마태 21,31)한 사람인데 예수께서는 ‘세리와 창녀들’(31절)이 바로 그런 이들이라고 밝히십니다.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믿지 않았고’, ‘생각을 바꾸지 않은’(32절) 또 다른 아들이지요.

여기서 눈여겨볼 것은 당시 유다 사회에서 적장자로 행세하던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 대신에 세리와 창녀처럼 멸시받고 소외된 이들을 맏아들로 호명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생각하는 인간 사이의 서열이나 분류는 하느님의 생각과 같지 않습니다.

사실 맏아들이건 아니건 아버지의 뜻에 처음부터 끝까지 충실하지 못했다는 점에서는 다를 바가 없지요. 맏아들도 아버지 면전에서 그분의 뜻을 거절하는 무례를 범했고, 또 다른 아들도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지 않는 잘못을 저질렀으니까요. ‘하느님 나라에 먼저 들어가는’ 특권은 오로지 ‘생각을 바꾸는’데 달려 있습니다. 지금까지 어떤 삶을 살았건 간에, 오늘 일하러 가는 사람, 바로 지금 생각을 바꾸어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 먼저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

이렇듯 하느님 앞에 완전무결한 인간은 없습니다. 맏아들이냐 아니냐 하는 서열도 없습니다. 먼저 들어가고 나중에 들어가는 구분은 있을지언정, 누구나 하느님 나라에 초대받았다는 점에서는 같습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 자신의 생각을 바꾸고 아버지의 사랑에 응답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이지요.

이 기쁜 소식에 고무되어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서로 용서하며 새로운 공동체를 이룬 제자들이 곧 교회입니다. 교회는 도덕적 엘리트들의 모임이 아닙니다. 과거에 자신이 얼마나 흠 없이 살아왔는지를 과시하며 그렇지 못한 이들을 탓하는 대신, 겸손하게 자기를 내려놓고 아버지께로 삶의 방향을 돌리려고 애쓰는 사람들의 자리가 교회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로부터 신자들은 “같은 사랑을 지니고 같은 마음 같은 생각을 이루어”(필리 2,2)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한 마음을 찬미했습니다.(제2독서; 필리 2,6-11) 나와 남을 가르고, 우열을 나누는 대신, 겸손한 마음으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고 자기 것뿐만 아니라 남의 것을 돌보는 삶, 교회는 그런 삶을 지향하는 곳입니다.


박용욱 미카엘 신부
대구대교구 사목연구소장



[기사원문보기]
가톨릭신문 2023-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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