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대표적인 여류 시인이자 베스트셀러 작가로 많은 사랑을 받아온 신달자(엘리사벳, 80)씨가 팔순을 맞아 자신의 문학과 인생을 톺은 시선집과 묵상집을 동시 출간했다. 각각 「저 거리의 암자」, 그리고 「미치고 흐느끼고 견디고」다. 「저 거리의 암자」는 60년간 발표한 1000편이 넘는 시 가운데 182편을 뽑아 새롭게 엮었고, 「미치고 흐느끼고 견디고」는 그보다 긴 80년의 인생길을 되돌아본다.
저 거리의 암자
문학사상
미치고 흐느끼고 견디고
문학사상
삶, 딱 한 자인데 가장 무겁고 복잡한
11월 1일 ‘시의 날’ 행사를 앞두고 만난 신달자 시인은 처절한 묵상집의 제목 ‘미치고 흐느끼고 견디고’와는 다르게 환하게 웃고 있었다.
“좀 강렬하죠. 실은 제 세 딸이 이 제목을 반대했어요. 평소에는 딸들 얘기를 잘 듣는 편인데, 이건 고집했어요. 왜냐면 제 인생을 얘기할 때 가장 먼저 뽑을 수 있는 단어들이거든요. 젊은 시절에는 모든 일에 미혹해서 쉽게 반하고 미치고 빠져들었어요. 그런데 인생이 좋지만은 않더라고요. 다른 사람 모르게 혼자 흐느꼈던 적도 많고, 마땅히 손을 잡을 만한 사람이 없어서 그게 또 큰 상처고 아픔이었어요. 결국 견디는 게 삶이더라고요. 때로는 욕설이 치밀어 오르는 일도 있었고, 무릎 꿇고 하느님께 기도한 적도 많고. 이번 책은 하느님께 바치는 묵상집이라서 더 솔직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제목의 결과 달리 책에 가장 먼저, 또 자주 나오는 단어는 ‘잘못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이다.
“그 말을 제일 먼저, 많이 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어요. 잘못한 게 사실 많죠. 원래는 선한 성격인데, 삶과 투쟁하며 억세졌어요. 말과 행동을 함부로 한 적도 있고, 계명대로 하지 못한 적도 있고요. 한편으로 살아가면서 가장 많이 해야 하는 표현이 이 말들일 거예요. 이런 사소한 낱말 하나하나가 고된 삶을 버틸 수 있는 힘이 되어준 것 같아요.”
1943년생. 그 시대에 숙명여대 국문학과를 졸업했고, 작가로서 유명세와 교수로서 안정적인 삶까지 누렸다. 그래서 제목이 유독 눈에 띄었는지 모르겠다. 힘겹지 않은 삶이 어디 있겠냐만, 고달픔을 얘기하기엔 너무 성공적인 삶이 아니었나. 그런데 80년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화려한 이력 뒤로 그보다 깊고 험난한 수렁들이 있었다. 21세에 등단했지만, 학업과 결혼으로 펜을 놓았고, 아이 셋을 낳아 행복한 가정을 이룬 듯했지만, 남편에 이어 시어머니까지 쓰러져 오랜 세월 병 수발과 생계를 꾸려야 했으며, 그로 인해 교수의 꿈도 50세가 되어서야 이룰 수 있었다. 책 제목처럼 그야말로 미치고 흐느끼며 견뎌온 삶이었다.
“내 인생에 스스로 상을 주고 싶은 부분이기도 해요.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일본의 고시바 마사토시 박사는 수상 소감으로 ‘굴욕을 참을 수 있어야 꿈을 이룹니다’라고 하는데, 그 말을 듣고 막 울었어요. 바로 내 얘기라서. 30대에 돈을 버느라 얼마나 많이 허리를 굽혔겠어요. 그때 당한 굴욕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어요. 은평구에 살 땐데 역촌동성당 성모상 앞에서 못 살겠다고 통곡한 적도 있어요. 새벽 3시에 수녀님이 제 울음소리를 듣고 나오셔서 달래주셨어요. 그러다 어린 애들을 보는데, 쟤들이 학생이 됐을 때 아빠는 몸을 제대로 못 쓰고 엄마는 물건 들고 돌아다니면 얼마나 마음이 상할까 싶더라고요. 밤새 울었던 게 힘이 됐는지, 푼돈밖에 못 벌던 시절에 대학원 공부를 시작했어요, 내 나이 마흔에.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하지만 모든 걸 이겨낼 수 있었던 힘은 그때까지 겪은 굴욕이었어요.”
기도, 부드럽게 아픈 곳을 어루만져주는 손
석사를 힘들게 끝냈지만, 박사과정은 경제적으로 수월했다. 그 사이 수필집 「백치애인」, 소설 「물 위를 걷는 여자」 등 네 권의 책이 베스트셀러에 오르며 많은 돈을 벌었기 때문이다. 밀려 있던 남편의 입원비를 모두 갚고, 한강이 보이는 아파트로 이사도 할 수 있었다. 일도 잘 풀려 쉰 살에 대학교수도 됐다. 하느님이 좋은 선물을 주려고 그렇게 혹독한 시련을 겪게 하셨던 게 아닐까.
“성당이 뭐 하는 곳인지도 몰랐어요. 성모님을 ‘애기 안고 있는 여자’라고 표현했을 정도니까.(웃음) 서른다섯 살에 남편이 쓰러졌는데, 그해 함께 세례를 받았어요. 그때 너무 힘들어서 처음 성당이라는 곳에 들렀는데, 병원이 있던 혜화동이었어요. 제일 마지막 의자에 앉아 십자고상을 바라보는데, 대개는 얼굴을 들고 있지 않잖아요. 그런데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시면서 ‘그래, 다 안다’ 하시는 거예요. ‘다 안다’는 건 핵심적인 말이에요. 막내가 두 살이고, 산소호흡기가 들어온 지 얼마 안 돼서 굉장히 비쌀 때라 너무나 막막한 상황에서 ‘다 안다’는 말을 듣고 통곡했어요. 이튿날 집에 갔더니 세 아이가 수두에 걸렸더라고요. 신발도 못 벗고 아이들을 끌어안고 우는데, 혜화동성당에서 봤던 성모님이 나를 안고 위로 올라가는,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경험을 했어요. 병원에 갔더니 20여 일 만에 남편이 눈을 떴어요. 그게 저에게 첫 기적이고, 그렇게 믿음이 시작된 거예요.”
이후에도 고행은 이어졌다. 남편은 24년을 투병했고, 시어머니도 9년을 누워 계셨다. 자신도 유방암 판정을 받았다. 하지만 믿음이 있었고, 시가 있었다.
“시련치고는 너무 각박했죠. 못으로 치면 몇백 개는 박혔어요. 그런데 이제 부를 사람이 생긴 거예요. 또 저는 시인이니까 이 고통의 순간을 힘이 되는 말로 표현하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고 할까요. 우리 정신과 감정은 보이지 않지만 그걸 시의 언어로 만져지게, 그게 글이고 예술이죠.”
감사하며 매일 최선을 다하다
80이라는 고지에서 보니 누구보다 성공적이고 평온한 삶만 나부낀다. 하지만 그 산을 이룬 수많은 바위와 골짜기가 있었기에 그녀의 글은 더 많은 울림과 감동을 선사했던 게 아닐까. 특히 그 숱한 감정을 ‘시’라는 가장 절제된 몇 마디 단어로 표현해온 것도 참 아이러니하다. 지금도 그녀는 시인으로, 엄마로, 할머니로, 그리고 누군가의 친구로 활발하게 생활하고 있다.
“바빠요.(웃음) 감사한 일이죠. 요즘은 책이 나와서 인터뷰도 많고, 만해 한용운 선생이 1918년 창간했던 문예지 「유심」이 다시 발행되고 있거든요. 이미 재창간호가 나왔고, 2호를 준비하고 있는데 주간을 맡고 있어요. 곳곳에서 열리는 시 낭송회에도 가야 하고요. 그런데 이 나이가 되면 아픈 데가 많아요. 갑자기 아픈 게 아니라 늘 아파요.(웃음) 통증도 내 일상이 아닐까. 여든 살이 넘으면 삶 자체가 기도입니다. 겸허하게 모든 걸 받아들이고 더불어 먹고 더불어 웃고, 그런 게 마지막 기도 같아요.”
그녀의 글에서 80이라는 숫자를 걷어내면 나이가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 미치고 흐느끼고 견디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런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마음을 나누고 싶을 것이다. 그래서 치열하게 젊음을 통과하고 있는 청년부터 그처럼 인생의 황혼을 걷고 있는 노년에게 마지막으로 위로의 말을 청해본다.
“사실 초등학교 아이들부터 90살 노인까지 처절하지 않은 사람이 없어요. 초등학생도 가야 할 학원이 많고, 중학생들은 사춘기라서 폭발적이고, 대입, 취업, 돈 문제, 나이가 들면 찾아오는 서운함과 외로움. 저도 삐쳐요.(웃음) 살아있는 자에게는 모두 고통이 있어요. 그런데 청년들의 고통도 그때 갑자기 온 게 아니죠. 일생에서 ‘나 죽었다 살아났다’는 생각으로 무언가 할 수 있는 시기가 젊을 때 아니겠어요. 정말 최선을 다해보는 거죠, 모든 역량을 쏟아서. 청년들에게 이렇게 말하지만, 스스로에게도 ‘지금 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어디까지니?’라고 묻습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거죠. 청년이든 노인이든 감사한 마음으로 매일 최선을 다하면서!”
윤하정 기자 monica@c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