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신앙 안에서 인간에 대한 깊은 성찰과 구도(求道)적 시각으로 문학의 보편적 가치를 추구한 구상 시인(요한 세례자·1919~2004). 그의 20주기를 맞아 (사)구상선생기념사업회(회장 이상국)가 20주기 추모 시선집 「적군묘지 앞에서」(구상 지음 / 136쪽 / 1만3000원 / 나무와숲)를 펴냈다.
구상 시인이 남긴 작품들 가운데 전쟁과 평화를 주제로 쓴 시 43편을 담았다. 대립의 암울함이 뒤덮은 오늘날 한반도에 시인의 작품들은 시대를 뛰어넘어 전쟁과 평화에 대한 깊은 성찰을 전한다.
구상 시인은 1919년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2000년대 문화 융성기를 살다 떠났다. 그의 형 구대준 신부(가브리엘·1912~1949?)가 성 베네딕도회 덕원수도원 소속 사제였고, 그 역시 한때 사제를 꿈꿨던 신학생이었을 만큼, 가톨릭 신앙은 그의 삶에 문화적으로 또 영성적으로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구상 시인도 동족상잔의 디아스포라(διασπορ?·박해를 피해 민족이 흩어짐) 피해자였다. 1946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합동 시집 「응향」(凝香)이 북한정권으로부터 제재를 받으면서, 이에 연루된 구상 시인은 황급히 월남했다. 시인은 그때 생이별한 어머니와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구대준 신부도 1949년 공산정권에 잡혀가 결국 순교했다. 구상 시인의 작품에 전쟁과 평화를 주제로 한 작품들이 많은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초토의 시> 연작, <모과 옹두리에도 사연이> 연작, <그리스도 폴의 강> 연작 등 이번 책에 실린 그의 시작들에는 전쟁으로 인한 상처가 곳곳에 드러난다.
“어제까지 너희의 목숨을 겨눠/ 방아쇠를 당기던 우리의 그 손으로/ 썩어 문드러진 살덩이와 뼈를 추려/ 그래도 양지바른 두메를 골라/ 고이 파묻어 떼마저 입혔거니/ 죽음은 이렇듯 미움보다도 사랑보다도/ 더욱 신비스러운 것이로다.” -<초토의 시·8 ? 적군묘지 앞에서> 제2연
민족 수난으로 겪은 고통스러운 개인사 속에서 그는 자연스럽게 작품 안에 반전과 평화 사상을 녹여냈다. 그러나 체제 옹호나 비판 같은 대립적 자세는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전쟁의 고통을 초월해 구원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과정을 그려낸다. 그의 영성적 씨앗이라고 할 수 있는 베네딕토 성인의 중용(中庸) 정신이 일관된 시인의 자세이자 가치관이었다. 그의 시작들은 이념을 뛰어넘어 인간에 대한 깊은 연민과 사랑을 바탕으로 평화를 이야기하고 있다.
문학평론가 김재홍(요한 사도) 시인은 시집 속 작품해설에서 “모든 것을 상실한 절망의 시대로부터 모든 것이 가능한 희망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구상 시인은 일관된 생성과 긍정의 시적 사유를 통해 비대립적 시 세계를 물려주었다”며 “(이번 시선집으로) 독자들은 한 세대 가운데에서 구상이 차지하는 문학사적 성취가 자기 시대의 한계를 뛰어넘는 것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