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의 일기장 / 정민 / 김영사
오랜 시간 정약용 연구해 온 정민 교수, 네 권의 일기 행간에 숨은 진실 드러내
“이렇게 시의 제목과 창작 시점을 바꿔 대미를 장식함으로써 「금정일록」과 「죽란일기」 전체를 퇴계에 대한 존모로 마무리 짓는 효과를 가져왔다. (중략) 이 같은 작위적 배치는 다산이 이 일기를 끊임없이 외부 독자의 눈길을 의식하면서 작성했다는 또 다른 방증으로 읽을 수 있다. 이에 따라 일기의 매 단락은 의도적 배치에 따른 의미를 지속적으로 외부로 향해 발신하게 되고, 독자 또한 그 의미의 추이에 집중하게 만든다.”(408쪽)
「금정일록」「죽란일기」「규영일기」「함주일록」은 조선 후기 문신이자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1762∼1836)이 남긴 일기다. 33세에 이가환·이승훈과 함께 천주교와 관련된 사학삼흉(邪學三凶)으로 지목돼 지방으로 좌천된 후 겨우 상경했다가 다시 외직으로 밀려나기까지 2년간의 기록이다. 따라서 모두 다산의 신앙 문제, 천주교를 둘러싼 시대적 맥락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연관이 있다.
「다산의 일기장」은 이 네 권의 일기를 다각적으로 분석해 행간에 숨은 진실을 드러낸 책이다. 오랜 시간 정약용을 연구해 온 한양대 국문과 정민(베르나르도) 교수가 집필했다.
저자는 다산의 4종 일기가 글쓴이의 내밀한 독백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다고 지적한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객관적 사실만 기술되며, 그 팩트를 선별하고 배열하는 시선을 통해서만 다산의 의도가 포착된다는 것이다. 글쓴이는 개인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채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는 성과를 거둔 반면 독자 입장에서는 아는 만큼만 읽히는 구조다.
“일기에는 전체의 의도가 있고, 선택된 각각의 에피소드가 그 의도를 뒷받침한다. 등장하는 많은 인물도 그날 어쩌다 만난 사람이 아니다. 인용한 글도 다 뜻이 있다. 의도 안에 수렴될 수 있는 사람과 공간과 사건만 선별해 무심한 듯 기록했다. 하나하나는 따로 놀지만, 전체 구성으로 보면 의도된 배치다. (중략) 그만큼 치밀하게 교직된 정치적인 텍스트가 바로 다산의 4종 일기다.”(24쪽)
저자는 다산의 생애가 천주교 문제를 배제하고는 그 정체성을 올바로 파악할 수 없다고 말한다. 따라서 책은 일기 본문과 함께 「다산시문집」에 실린 편지·시문, 「정조실록」「일성록」「승정원일기」와 각종 상소문 및 척사 기록, 족보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함으로써 역사적 사실과 일기 속의 정황을 교차 검증한다. 이를 백 개의 질문과 백 개의 답변으로 풀어 당시 언어로 표현하지 못한 천주교에 얽힌 다산의 속내를 파헤친다.
“내가 이렇게 다산 일기의 속살을 읽은 것은 다산을 위선자로 몰고 가거나, 신앙에 대한 정체성 문제를 양단간에 갈라보려는 의도와는 전혀 무관하다는 점을 한 번 더 밝혀둔다. 다산의 일기를 통해 드러나는 일부 부정합과 첨예한 갈등 속에는 다산과 그 시대가 맞닥뜨렸던 거대한 모순이 담겨 있다. (중략) 다산의 엇갈리는 갈지자 행보는 그의 우유부단함에 대한 징표가 아니라, 서학이라는 거대한 체계와 대면한 18세기 조선의 어정쩡한 스탠스를 보여준다.”(520쪽)
정민 교수는 조선에 서학 열풍을 불러온 천주교 수양서 「칠극」을 번역해 제25회 한국가톨릭학술상 번역상을 받았고, 다산을 다각도로 연구해 「다산선생 지식경영법」「다산의 재발견」「파란」 등을 저술했다.
윤하정 기자 monica@c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