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명 프란치스코로 선택한 이유
산타 마르타 집에 살게 된 배경
죽음·장례에 대한 생각 등 담겨
한글 번역본엔 방대한 주석 추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희망이 허상이 아니며 우리를 실망시키지도 않는다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모든 이는 영원한 봄날에 꽃을 피우려고 태어납니다. 마지막 날에 우리는 이렇게 고백할 것입니다. ‘당신께서 함께하지 않으신 순간은 제 기억 속에 없나이다.’”(9쪽)
프란치스코 교황이 6년간 직접 집필한 「희망」(원제 ‘Spera’)이 전 세계 100여 개 나라에서 동시 출간된다. 「희망」은 최초의 교황 자서전으로, 교황은 삶에서 가장 귀하게 여기는 가치인 ‘희망’을 다채로운 에피소드와 함께 노래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본명은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료(Jorge Mario Bergoglio). 2013년 제266대 교황으로 선출됐다. 최초의 라틴 아메리카 출신 교황이다. 늘 겸손하고 소탈한 모습으로 ‘가난한 이들의 교황’으로 불리며, 사회적 약자와 소외된 이들을 돌보는 데 힘써 여전히 세계적으로 가장 영향력 있는 리더로 꼽힌다.
책은 교황의 생애 주기를 따라 1장부터 25장까지 전개된다. 전반부에서는 이탈리아에서 아르헨티나로 이주한 조상들의 이야기, 부모 세대가 겪은 전쟁의 아픔을 비롯해 신앙의 뿌리가 뻗어 나간 유년기의 다양한 경험을 소개한다. 후반부에서는 젊은 시절의 고민과 사제성소를 식별하고 예수회 공동체에서 열정적으로 사목했던 일들, 사도좌에 앉게 된 콘클라베(교황 선출) 과정 등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교황명을 프란치스코로 선택한 이유, 사도궁 내 교황 관저가 아닌 산타 마르타의 집에서 살게 된 배경도 담겨 있다.
“제 이름이 77번째로 호명되자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습니다. (중략) 브라질 타쿠아리 프란치스코회 신학교 출신의 우메스 추기경님이 자리에서 일어나 저를 따뜻하게 포옹하면서 말씀하셨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잊지 마십시오.’ 그 말씀이 저를 깊이 찔렀습니다. 온몸으로 와닿았습니다. 바로 그때,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이 제 마음속에 떠올랐습니다.”(331쪽)
1970년대 어느날 어머니와 함께 집에서.
18살 때 첫 신분증.
프란치스코 교황 신생아 때 모습.
고령에도 이라크·일본·몽골 등을 찾아 나선 행로, 전쟁 종식과 평화를 위해 노력한 다양한 이야기도 펼쳐진다. 최근 폐렴으로 입원 치료를 받으면서도 우크라이나를 비롯한 모든 분쟁 지역의 희생자들과 평화를 위해 기도했던 교황은 이주와 전쟁은 동전의 양면이라고 말한다. 대규모 이주민을 만들어내는 공장이 바로 전쟁이며, 무기를 든 전쟁이 아니더라도 기후 변화와 빈곤 같은 소리 없는 전쟁이 수많은 희생자와 가장 작고 가난한 이들을 낳는다고 지적한다.
“하느님의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가난한 이들에게 맡기신 절박한 소명을 우리가 피할 길은 없습니다. 성경 어디를 봐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조차 없는 이, 억압받는 이, 바닥으로 내몰린 이, 고아와 과부, 이방인과 이주민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중략) 오늘날 전쟁은 세계의 특정 지역에서 벌어지지만, 그 전쟁에 쓰이는 무기들은 다른 나라에서 만듭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무기를 만든 나라들이, 바로 그 전쟁으로 발생한 난민들의 입국을 거부합니다.”(35쪽)
한 세기에 가까운 이야기가 담긴 만큼 세대별·상황별로 특별히 와닿는 메시지도 있을 것이다. 교황은 젊은 시절 실수를 솔직히 털어놓는가 하면 정치적·사회적으로 급변하는 현대사를 한 인간이자 사제로 겪어온 이야기 등을 진솔하게 기록했다. 다양한 예술작품과 여러 예화를 통해 담백하면서도 깊이 있는 생각을 전한다. 무엇보다 쉽고 포근한 문체가 세대와 국경을 아우른다. 가족과 신생아 때의 모습 등 그간 공개되지 않았던 사진들도 친근함을 더한다.
교황은 “진실은 주님께서 우리 삶의 시간을 주관하신다는 것”이라며 “수술을 받을 때에도 교황직 사임을 생각해 본 적은 없다”고 적었다. 다만 “선출 직후부터 건강상의 이유로 사임해야 할 경우를 대비해 교황청 국무원장에게 사임서를 맡겨 두었고, 죽음에 대해 아주 현실적인 태도가 있다”고 언급했다.
“때가 되면 저는 성 베드로 대성전이 아닌 성모 대성전에 묻히게 될 것입니다. 바티칸은 제가 마지막으로 봉사하는 집일 뿐, 영원한 안식처는 아니니까요. 지금은 촛대 보관용으로 쓰이는 방에서, 제가 늘 의지하고 교황 재임 중에 백 번도 넘게 은총의 품에 안겼던 평화의 모후 곁에 잠들 것입니다. 그렇게 저를 위한 모든 장례 준비는 끝났다고 합니다. 교황 장례 예식이 너무 성대해서 담당자와 상의하여 간소화했습니다. 화려한 장례 제대도, 관을 닫는 특별한 의식도 없애기로 했습니다. 품위는 지키되, 다른 그리스도인들처럼 소박하게 치르고 싶습니다.”(343쪽)
프란치스코 교황은 책에서 ‘가난한 이들의 교황’이라는 수식어를 그다지 반기지 않는다고 언급했다. 복음은 모든 이를 향해 열려있으며, 개인이나 계급·처지·집단을 차별하지 않기에 교황 역시 모든 이의 교황이라는 것이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교황 직함은 ‘하느님의 종들의 종’이다. 모든 이를 섬기고 모든 이에게 봉사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교황이 걸어온, 또 걸어갈 발자취에 담긴 ‘희망’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당초 교황 사후에 공개될 예정이던 책은 2025년 가톨릭교회 정기 희년을 맞아 출간이 결정됐다. 이번 희년의 주제가 ‘희망의 순례자들’로, 전쟁과 분쟁, 정치적 불안과 사회적 갈등, 개인적 아픔 등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사람들에게 힘과 위로, 사랑과 용기를 전하기 위함이다.
「희망」 번역은 서울대교구 이재협 신부를 비롯해 바티칸뉴스 한국어 번역팀이 맡았다. 원서에는 포함되지 않은 방대한 주석이 추가됐다. 가톨릭은 물론이고, 유럽 및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와 문화·인물 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번역진은 “이 책은 자서전이나 회고록을 넘어서는 영적 유언이자 우리 시대에 거는 교황의 대화”라고 전했다.
책은 예약 판매가 시작돼 10일부터 접할 수 있을 예정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1936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났다. 1958년 예수회에 입회해 1969년 사제품을 받았다. 예수회 아르헨티나 관구장, 부에노스아이레스 대교구장을 지냈고, 2001년 추기경에 서임됐다. 2013년 교황으로 선출됐고, 2014년 8월 우리나라를 방문해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시복식을 집전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