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후 삶과 젊은 세대에 대한 미안함 풀어내
회사 떠난 뒤 반찬 만들어 배달하는 봉사자로
“많이 들어서 제일 익숙한 호칭은 회장인데, 반찬 전해드리는 어르신들은 주방장 아저씨라고 불러요.”
최근 출간된 「지금이 쌓여서 피어나는 인생」을 읽고 인터뷰를 요청했는데, 막상 연락을 주고받으면서 머리가 복잡해졌다. 저자가 다름 아닌 박용만(실바노) 전 두산그룹 회장이기 때문이다. 대한상공회의소 회장도 역임한 그는 현재 (재)같이걷는길의 이사장이기도 하다. 그래서 4일 서울 한남동에 위치한 재단 사무실에서 만났을 때 편한 호칭부터 물었다.
“함께 봉사하는 분들이 대장이라고 불러줄 때가 가장 좋아요. 골목골목 찾아다니니까 ‘골목대장’이라고, 애정의 표시니까 좋죠. 지금은 회장도 아니고, 그렇잖아도 책 관련 인터뷰하자며 문화부가 아니라 정치·경제부에서 부장 기자가 오겠다고 해서 막긴 했습니다.(웃음)”
문화 전담인 기자는 덕분에 편안한 마음으로 ‘박용만 작가’와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 책 내용 역시 재계 인사로서의 회고록이나 경영인을 위한 자기계발서가 아니라 그가 은퇴 후 열어간 다채로운 행보와 다져진 생각의 실타래다.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걸 좋아해요. 그걸 글로 옮긴 겁니다. 가까운 사람들과 제 삶의 이야기를 나누면서 즐겁고 행복했기 때문에 독자들과도 그런 소통을 하고 싶어서요.”
책에는 그의 표현을 빌려 ‘위아래 한 세트의 잠옷을 입고 겨드랑이 아래로 이불을 덮고 천장을 응시하며 잠드는 기업 회장’의 모습은 없다. 늘어난 잠옷을 걸치고, 요거트 뚜껑을 핥아 먹느라 코에 묻히고, 직접 요리도 하고, 길바닥에 자빠지고, 돈 꿔달라는 친구 때문에 고민하는? 애처가 엘리트의 이색 은퇴기다.
“드라마 속 회장님들의 모습과는 좀 멀어요. 저는 그렇게 성장하지 않았거든요. ‘언젠가 부친이 경영하는 회사의 회장이 될 거다’라고 생각할 처지가 아니었어요. 그 회사에 들어갈 수 있다는 생각도 안 해봤고요. 청소년기까지는 전혀 다른 환경에서 살았고, 또 유학으로 신혼 때부터 집사람과 미국에서 7년을 살았어요. 그래서 그냥 둘이 하는 삶에 익숙해요.”
수필이기에 그의 개인사가 곳곳에 녹아 있다. 전작인 「그늘까지도 인생이니까」에는 제목처럼 성장 배경에 관한 이야기도 담았다.
“사실이니까 그걸 밝히는 데 용기가 필요한 상황은 아니었어요. 아주 개인적인 이야기임에도 책에 쓴 이유는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예요. 그렇지 않으면 ‘남부럽지 않게 자란 사람이 왜 이런 얘기를 할까’ 하실 테니까요.”
책에는 크게 젊은 세대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 신앙과 어르신들을 도우면서 느꼈던 점, 마지막으로 돌아본 삶에 대한 생각들이 적혀 있다. 전반에 젊은 세대를 향한 지지와 이해가 묻어난다.
박 전 회장이 사무실에 있는 십자가를 설명하고 있다. 비무장지대 폐철조망으로 만든 십자가로, 자신이 기획해 프란치스코 교황에게도 전달됐다.
“책을 관통하는 하나의 생각은 젊은 사람들에 대한 미안함이에요. ‘우리 세대는 열심히 살았고 나라를 이만큼 부강하게 만들었고’ 이런 생각을 하며 살았거든요. 그것도 맞지만, 결과적으로 ‘우리가 만들어놓은 오늘의 세상이 젊은 사람들한테는 참 힘들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 세대가 책임지고 고쳐야 된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솔루션은 과감하게 젊은 사람들한테 맡겨야 해요. 우리의 마지막 과제입니다. 맡긴다는 게 참 힘들거든요. 저도 회사에서 청년 세대와 얘기할 때 처음에는 당황스러웠는데, ‘이 사람들이 열어가는 세상은 우리가 열어온 세상보다 훨씬 좋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는 하고 싶은 것도 많고 실행력도 뛰어난 행동가다. 뭘 하고자 하면 바로 추진하는 편이다. 꾸준히 한 것도 있고 잠깐 스친 것도 있지만, 생각에만 그친 건 거의 없단다. 그래서 책의 내용이 더 다채롭다. 그런 그가 형편이 어려운 어르신, 거동이 불편한 이들에게 건넬 반찬을 벌써 10년째 만들고 있다. 손수 만들어 직접 전달하는 게 여느 ‘회장’과 가장 다른 점일 것이다.
“취미와는 다르죠. 하느님 뜻이라고, 신앙이 아니더라도 제가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나아가라’는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정진석 추기경님께 조언을 구했더니 ‘후원도 값진 일이지만 담장 너머로 먹을 것을 던지는 일은 안 되게 해야지’라고 하셨어요. 이웃이 어떤 상황인지, 무엇이 필요한지 모르는 상태에서 ‘나는 도움을 줬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한 경계의 말씀이셨죠. 그래서 서울대교구 사회사목국에서 알려준 몇몇 주방에서 일하면서 식사하는 분들을 직접 만났고, 주변 사람들이 동행했고, 그러다 우리만의 주방을 갖게 된 거예요.”
매주 월·목요일은 바쁘다. 오전 8시부터 식재료를 손질해 11시 즈음 조리까지 마무리한다. 그 반찬으로 봉사자들이 함께 식사를 한 뒤 11시 30분부터 배달에 나선다. 인터뷰 당일도 19명의 봉사자와 함께 아침부터 손질한 재료로 만든 반찬을 골목골목 들어찬 142가구에 전달했다.
“네 가지 찬인데 넉넉히 준비해요. 어르신들이 대개 2~3일은 드시고, 두 번 전해드리니까 일주일의 상당 부분을 해결하시는 거죠. 지금은 경차를 마련했지만 처음에는 특수 배낭을 메고 3개 동을 직접 걸어다니느라 힘들었어요. 그런데 봉사자들이 더 행복감을 느끼고 다들 웃는 얼굴로 돌아가요.”
책 곳곳에는 신앙도 스며 있다. 교계도 아닌 일반 출판사에서 펴낸 책 날개에 세례명까지 적었다. 32살에 세례를 받고 50대에 본격적으로 맛들인 신앙은 그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인지 사무실 곳곳에도 성물이 자리하고 있다.
“절반 이상을 신앙 관련 글로 썼는데, 출판사에서 많이 덜어냈어요.(웃음) 저를 키운 외할머니가 독실한 분이셨어요. 막연하게 ‘언젠가는 성당에 가야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죠. 세례를 받고도 20년은 냉담을 했습니다. 그러다 2005년 어느 주일 아침에 갑자기 성당에 가야 될 것 같은 거예요. 그날 미사 1시간이 그렇게 즐겁고 행복하더라고요. 설명이 안 돼요. 이후 열심히 다녔고 신앙적인 체험에 대해 자주 이야기하는데, 어떤 사람은 ‘정말 갖다 붙이기 잘한다고, 어떻게 다 하느님으로 연결하느냐’고 해요.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죠. 그런데 우리 모두에게 크고 작은 기적은 다 있어요. 자꾸 생각을 하면 그냥 모르고 지나갈 일도 ‘하느님이 주신 선물’이라는 걸 이해하게 됩니다.”
신앙인으로서 많은 은총을 받았고 부끄럽지 않게 살고 있다는 방증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막 70대에 들어선 그의 일상은 시름없이 잔잔한 행복이 흐르는 듯하다.
“아무래도 은퇴했기 때문에 업무의 중압감이나 성취에 대한 압박감이 전혀 없으니까요. 조직을 맡고 있지 않아서 책임과 의무도 가볍고요. 그러나 이 편안한 해방의 문이 열린 건 불과 3년 전이에요. 20~30대부터 이렇게 살 수 있겠습니까?”(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