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2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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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영적 아버지, 다이아몬드 신부님

[월간 꿈CUM]꿈CUM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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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골롬반외방선교회 고(故) 안토니오 다이아몬드 신부


먼 기억에서 1960년대의 일을 떠올려 본다. 
대학 졸업 후, 원하는 교사 채용 고시는 없고 공무원 시험이 있기에 응시하여 고향인 광양군청 공보실에서 근무할 때의 일이다. 갑자기 친구도 없고, 문화 시설도 없고, 오직 책만 읽으며 외로이 지낼 때, 교리 공부할 시간이 없어 미루던 천주교에 입교하리라 결심하였다.

당시 광양은 70여 명 신자가 다니는 공소만 있었다. 그곳에서 알아듣지도 못하는 라틴어로 미사 예절을 배우고, 주일마다 순천 본당으로 다니며 교리 공부를 했다. 본당에는 성골롬반 선교회 소속 신부님이 두 분 계셨다.

주임 신부님은 아일랜드에서 오신 안토니 다이아몬드 신부님, 보좌 신부님은 멕시코에서 오신 알바 신부님, 두 분이 번갈아 공소에 나오셨다. 다이아몬드 신부님은 한국에 오신 지 5년째라 우리말을 제법 하셨고, 알바 신부님은 갓 오신 분이라 신자들과의 사이에서 내가 통역을 맡았다. 대학 졸업 직후라 별 무리는 없었다. 덕분에 즐겁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기에 두 분 신부님은 내 기억 속에 또렷이 살아 계신다.

특히 허허로운 내 영혼을 말씀으로 채워 주시고 세례를 주신 다이아몬드 신부님을 나는 지금도 영적 아버지로 모시고 있다. 추운 겨울날 순천에 나가서 마지막 찰고를 할 때, 신부님께서는 잘했다고 칭찬하시며 「준주성범」 한 권을 선물로 주셨다. 아무 때나 펴보면 상황에 맞는 지혜를 얻고 위로도 받을 거라는 말씀과 함께.

1964년 12월 20일, 전날 밤 곱게 싸서 머리맡에 두었던 흰 치마, 흰 저고리, 흰 머리쓰개, 이름표, 초, 등이 담긴 보자기를 들고, 가슴 설레며 대모님과 함께 순천으로 갔다. 우리 공소에서 10여 명, 본당 신자까지 150여 명의 대가족이 마당을 가득 채웠다. 참으로 감격스러운 대축제였다. 예절은 마당에서부터 시작되어 실내로 옮겨갔다. 한 장면 한 장면 얼마나 거룩한 예식이었던가. 마침내 나는 고등학교 때부터 갈망하던 천주교 신자가 되어 이름도 예쁜 ‘실비아’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그날 신부님의 강론 중 한마디는 지금도 기억한다. 신부님은 조금 서툴지만, 우리말을 아주 귀엽게 잘 하셨다.
“여러분의 영혼을 만일 지금 볼 수가 있다면 그것은 아주 깨끗하고 맑아서 황홀하며 눈이 부실 것입니다. 이로써 여러분은 모든 원죄와 본죄를 씻고 천주의 자녀가 되어 우리의 가족이 되었습니다.”

강론을 들으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던 기억도 새롭다.

영세 후, 바로 교사 시험이 있어 응시했다. 준비가 부족했지만, 주님의 도우심으로 합격하고 이듬해 3월, 광주에 있는 전남여고 국어교사가 되어 순천을 떠났다. 신부님을 못 봬 섭섭해하다가 어느 주말, 고향 가는 길에 일부러 순천에 들렀다. 본당을 찾아가니 마침 저녁 미사 시간이라 참례하게 되었다. 고해소 앞에 몇 사람이 서 있는 걸 보고, 나도 꺼림칙한 죄가 있어 차례를 기다렸다가 들어갔다. 은근히 다이아몬드 신부님이 아니기를 바랐지만, 목소리를 들으니 신부님이셨다. 머뭇거리는 나에게 “말하세요, 어서 말하세요” 하고 채근하시던 신부님. 나의 고백을 들으시고 따뜻이 조언해 주시던 신부님. 게다가 자상하기도 하시지! 미사가 곧 시작되니 성체부터 영하고 보속은 나중에 하라고 말씀해 주시던 신부님.

미사 후, 마당에서 신자들과 인사를 나누는 시간. 나는 고백한 죄가 부끄러워 주춤거리는데, 신부님께서 깜짝 반기며 ‘실비아!’ 하고 부르신다. 순천에 언제 왔느냐, 교사 생활은 어떠냐, 이것저것 물어주시고 오늘 참 잘 왔다며 기뻐하셨다. 사실은 곧 본국으로 떠나 일 년 넘게 머무르실 계획이라 다음 주에 광주 주교관으로 옮기실 거라며 광주에서 한번 보자고 하셨다. 덕분에 부끄러움은 싹 가시고, 나는 아주 홀가분한 마음으로 성당을 나왔었다.
며칠 뒤, 귀국 선물로 쓰시라고 자게 박힌 재떨이 하나를 사 들고 신부님을 찾아갔다. 영적 아버지 신부님이 멀리 고국으로 가신다니까 왠지 마음이 허전했다. 그때 신부님이 하신 말씀.

“실비아, 지금 좀 싱숭생숭해요? 나도 싱숭생숭해.”

뜬금없이 생뚱맞은 우리말을 쓰시는 바람에 얼마나 우스웠는지! 며칠 전에 배웠다며 이럴 때 써도 괜찮으냐고 물으셨다. 나는 “네, 좋아요. 딱 좋아요.” 대답하고 함께 웃었다. 

“나, 처음 한국말 못해 고생 많이 했어. 그래서 종일 책상에 붙어 앉아 정말 열심히 공부했어. 이제 귀국했다가 돌아오면 또 열심히 해야 해.”

신부님이 안 계시는 동안 마음이 스산할 때, 「준주성범」을 자주 펴보며 위로를 받곤 했다. 신부님은 일 년 넘게 귀국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셨다. 소식을 듣고 대모님과 함께 당신께서 주임신부로 부임하신 카리타스 수녀원을 방문했다. 나는 아버지를 만난 기쁨에 달려가 안기고 싶었지만 참고 있는데, 신부님께서 먼저 “자, 우리 악수!” 하며 손을 내밀어 주셨다. 그리고 한참 동안 즐거운 여행담을 들려주셨다. 당신의 본국 아일랜드를 비롯해 독일, 이탈리아, 필리핀, 일본. 그리고 내 전공에 맞춰 문학 이야기도 하셨다. 예츠, 키츠, 셰익스피어. 그래도 가장 많이 나눈 대화는 성경 말씀. 나는 그동안 궁금했던 것을 자꾸 질문하고, 신부님은 명쾌히 답해 주셨다.

그 뒤, 배우자를 고르느라 방황할 때마다 신부님께 편지를 드리고 많은 조언을 받았다. 그리고 마침내 서울에 있는 청년과 정혼했을 때, 맨 먼저 신부님을 찾아갔다. 신부님은 관면혼배를 권하셨다. 다행히 그는 천주교에 입교할 것을 약속했기 때문에 광주로 내려와 나와 함께 카리타스 수녀원으로 갔다. 대모님이 와 주셨고, 마침 광주여고 동기동창이 그곳 수녀님으로 있어 두 분을 모시고 관면혼배를 잘 치렀다.

그때 하신 말씀.

“실비아, 남편을 하늘같이 받들면 가정생활은 자연히 행복해질 겁니다. 잊지 마세요.”

세상에, 이럴 수가! 분명 내 쪽에 유리한 말씀을 해 주실 줄 알았더니 이럴 수가! 나는 몹시 당황했다. 은근히 약이 올라 입을 비쭉대며 조금 토라졌던 것도 같다.

1967년 결혼을 하고 서울로 왔다. 그런데 살면서 그 말씀이 자꾸만 떠오른 게 아닌가. 이것저것 의견이 달라 다투고 싶을 때도, 과음으로 밤늦게 들어와 미워 죽겠을 때도, 그 말씀이 떠올라 참고 또 참았다. 하여간 그 말씀이 내 결혼생활에 큰 영향을 미쳤음이 사실이다. 그러다 보니 남편으로부터 신뢰받는 아내가 되었다. 결과적으로 그 말씀은 나에게 유리한 말씀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젊은 여인들에게 말한다. “남편을 왕으로 모시면 당신은 왕비가 됩니다.” 

 
제주 새미 은총의 동산 입구


그토록 고마운 신부님을 서울로 온 뒤에는 한 번도 찾아뵙지 못했다. 늘 소식을 궁금해하다가 수년 전 제주도 이시돌 피정을 갔을 때다. 그곳 임피제 신부님이 골롬반 선교회 소속인 것을 알고 여쭈어보았다. 어머나! 암으로 고생하시다가 고국으로 돌아가 선종하셨다고 했다.

아아, 나의 영적 아버지 다이아몬드 신부님!
당신의 딸 실비아가 반세기도 더 지난 뒤에야 문안드립니다. 죄송해요. 용서해주세요. 
지금은 천상 영복을 누리고 계시지요? 하늘나라에 가서는 꼭 찾아뵙겠습니다.  


글 _ 안 영 (실비아, 소설가, 수원교구 분당성요한본당)
1940년 전남 광양시 진월면에서 출생했다. 1965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했으며, 장편소설 「영원한 달빛, 신사임당」 「만남, 그 신비」, 소설집 「가을, 그리고 山寺」 「가슴에 묻은 한마디」 「비밀은 외출하고 싶다」, 수필집 「아름다운 귀향」 「나의 기쁨, 나의 희망」 「나의 문학, 나의 신앙」, 시집 「한 송이 풀꽃으로」, 동화 「배꽃마을에서 온 송이」 등을 펴냈다. 2023년 9월, 장편소설 「만남, 그 신비」로 ‘황순원 문학상 작가상’을 수상했다. 한국소설가협회, 한국여성문학인회, 가톨릭문인협회 회원이다.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25-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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