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1794년 7월 17일 단두대에서 처형된 수녀 16명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프랑스대혁명의 공포정치가 절정에 달했던 그날, 콩피에뉴의 거룩한 강생 맨발 가르멜 수녀회 수녀들은 비밀 집회와 반자유 서적 소지 등의 혐의로 국민공회 공안위원회의 명에 따라 처형됐다. 이들은 2024년 12월 18일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성됐다.
이 비극적 실화는 1931년 독일 작가 게르트루트 폰 르포르의 역사소설 「단두대의 최후 여인」을 통해 먼저 문학적으로 형상화됐다. 이후 영화 시나리오 작업을 위해 프랑스 가톨릭 문학의 거장 조르주 베르나노스에게 집필이 의뢰됐지만 그는 작업 도중 육필 원고만 남긴 채 1948년 세상을 떠났고, 평론가 알베르 베갱의 손을 거쳐 1949년 희곡으로 출간됐다. 이후 프랑시스 풀랑크의 오페라를 비롯한 영화와 연극 무대에서 거듭 작품화됐다.
이번 번역본은 2015년 베르나노스 전문 연구진이 작가의 육필 원고를 전면 재검토해 펴낸 개정판을 따랐다. 베르나노스 전공자인 번역자의 섬세한 번역과 상세한 각주가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작품의 중심에는 귀족 출신 젊은 여성 블랑슈 들라포르스가 있다. 어머니의 죽음과 함께 세상에 태어난 그는 극심한 공포심을 안고 가르멜 수도원에 들어가지만, 혁명의 폭풍은 수도원마저 집어삼킨다. 순교를 서원했던 블랑슈는 공포에 질려 수녀원을 빠져나오고, 동료 수녀들이 체포돼 파리로 호송됐다는 소식을 듣는다. 사형 집행이 끝나가는 시점, 군중 속에 있던 그는 단두대를 향해 걸어 나간다.
“저는 그분들이 죽는 걸 원하지 않아요! 저도 죽고 싶지 않아요!” 작품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이 외침은 단순한 두려움의 표현이 아니다. 베르나노스는 죽음 앞에 선 인간의 공포를 정면으로 응시한다. 그의 인물들은 신앙을 가졌음에도 두려워하고, 서원을 했음에도 도망친다. 작가는 그 나약함을 숨기거나 미화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공포를 끝으로 삼지 않는다. 자신의 약함과 화해하고 죽음과 마주하는 블랑슈의 기적은, 옮긴이의 말대로 참된 영적 가난의 종국적이며 완전한 승리의 표징이다.
수녀들이 죽음을 앞두고 성가를 부르는 마지막 장면도 마찬가지다. 베르나노스는 이 장면을 숭고한 감동으로 포장하지 않는다. 폭력은 폭력이고 죽음은 죽음이다. 그럼에도 그 자리에 다른 무언가가 함께 있다는 것, 그것이 무엇인지를 작품은 질문으로 남겨둔다. 죽음의 공포와 의미를 다층적으로 묵상하도록 하는 희귀한 작품이다. 특정 종교의 틀을 넘어 ‘가치’에 대한 성찰로 독자를 이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