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마음, 교회, 선교, 친교, 평화, 복음, 연약함, 정의, 희망. 짧고 단순해 보이는 이 단어들 하나하나는 오늘의 세계를 향한 묵직한 물음이자 선언이다.
책은 레오 14세 교황 즉위 후 행한 강론과 연설에서 핵심 문장들을 추려 엮은 묵상서다. 체계적인 신학 논증보다는 구체적인 청중과 상황을 염두에 둔 현장의 언어에 가깝지만, 열 개의 주제를 가로지르는 중심 메시지는 한결같이 복음을 향해 있다. 페루에서 10여 년을 선교사로 살고 치클라요교구 주교로서 불의와 빈곤의 현실을 온몸으로 통과해 온 그의 시선과 경험이 곳곳에 스며 있다. 복음에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다는, 현장에서 길어 올린 확신이 그 바탕을 이룬다.
기저를 흐르는 것은 성 아우구스티노의 영성이다. 성 아우구스띠노 수도회 사제로서 그 영성에 깊이 뿌리내린 교황은 서문에서 열 개의 단어 가운데 특별히 ‘그리스도, 친교, 평화’ 세 단어를 고른다. 서로 무관해 보이는 이 세 단어는 실은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으며 하나의 관계로 묶여 있다”고 말한다. 그리스도를 중심에 모시는 것이 친교로 이어지고, 그 친교가 평화의 토대가 된다고 역설한다.
책에서 그리는 그리스도는 멀고 추상적인 존재가 아니다. “믿음이란 초월적 존재를 향한 인간의 고된 노력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삶 안에 기쁘게 받아들이는 것이며 하느님이 우리 마음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사실을 새롭게 깨닫는 일”이다. 여러 군데 인용된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가르침은 교황의 영성적 뿌리를 엿볼 수 있는 소중한 창이 된다.
현실의 불의를 직시하는 데도 주저함이 없다. “많이 가진 이들이 언제나 더 많이 갖고, 반대로 덜 가진 이들은 점점 더 가난해지는 구조적 불의를 더 이상 묵인할 수 없다”고 말하며, “증오와 폭력은 내리막길처럼 걷잡을 수 없이 번져 나가 민족들 사이에 빈곤을 확산시킬 위험이 있다”고 경고한다. 그러면서도 “서로를 형제로 받아들이려는 친교의 열망이 온갖 형태의 극단주의를 이겨 내는 힘이 될 수 있다”고 독려한다.
서문 끄트머리에서는 알제리에서 순교한 크리스티앙 드 세르제 복자의 기도를 빌려 독자에게 묻는다. “먼저 ‘내가 무기를 내려놓게 하소서’라고 청하거나, ‘우리가 무기를 내려놓게 하소서’라고 기도하지 않는다면, ‘그가 무기를 내려놓게 해 주소서’라고 기도할 자격이 있을까요?” 그리고 아우구스티노의 말씀으로 서문을 닫는다. “우리가 바르게 살아간다면 우리 시대는 좋아질 것입니다. 우리 시대는 우리 자신입니다.” 이 인용구는 책 전체의 메시지라 할 수 있다.
서울대교구 총대리 구요비(욥) 주교는 추천의 글에서 “레오 14세 교황님의 신학적 통찰과 인격적 따스함이 더욱 깊이 다가온다”며, “복음의 참뜻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의 참다운 제자와 사도로 성장하는 영적 자양분을 얻을 수 있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아울러 “2027년 한국을 방문하는 교황을 맞이할 준비로서도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고 덧붙였다.
역자 후기를 통해 이재협(도미니코) 신부는 “복음이 오늘 나의 삶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묻는 독자라면, 또 그 물음에 레오 14세 교황의 답을 가까이에서 듣고 싶었던 독자라면 더없이 좋은 동반자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